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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626년 4월, 영국 최고의 지식인 한 명이 닭 한 마리 때문에 죽었어요.
이름은 프랜시스 베이컨.
영국 최고 법관이자 철학자였고, 오늘날 '경험론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이에요.
그해 3월, 베이컨은 런던 외곽 하이게이트 언덕을 마차로 지나고 있었어요.
그러다 갑자기 마차를 세우더니 근처 농가에서 닭 한 마리를 사 왔어요.
그가 한 일은 이거예요. 닭의 배 속에 눈을 가득 채워 넣는 거였죠.
마침 그날 눈이 내려 있었어요.
베이컨이 검증하고 싶었던 건 단순한 질문이었어요.
차가운 온도가 고기의 부패를 막을 수 있을까?
오늘날로 치면 냉장고 원리예요.
그런데 베이컨 시대엔 아무도 실험으로 검증한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는 직접 해보기로 했죠.
문제는 그날 날씨가 너무 추웠다는 거예요.
차가운 바람 속에서 눈을 맨손으로 만지다가 그 자리에서 심한 오한을 느꼈어요.
결국 폐렴으로 이어졌고, 약 3주 뒤인 4월 9일 베이컨은 세상을 떠났어요.
관찰과 실험을 일생 동안 주창한 철학자가, 자신이 주창한 그 방법을 실천하다가 죽은 거예요.
역사적 아이러니 중에서도 이만큼 완벽한 경우는 드물어요.

베이컨은 모든 대학이 2천 년간 가르친 책을 쓸모없다고 했어요.
그 책의 주인공은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 그가 쓴 논리학 책 『기관(Organon)』은 베이컨 시대까지 유럽 모든 학교의 표준 교과서였어요.
1620년, 베이컨은 『신기관(Novum Organum)』을 출간했어요.
제목을 한국어로 풀면 '새로운 도구'예요.
이 제목 자체가 선전포고였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관』을 내 책이 갈아치우겠다는 뜻이니까요.
책 안에서 베이컨은 '4대 우상'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어요.
우상이라고 해서 신상이나 조각품 얘기가 아니에요.
인간이 진실을 볼 때 자꾸 빠지는 네 가지 착각을 가리켜요.
종족의 우상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편견이에요.
동굴의 우상은 개인의 경험과 교육이 만든 편협함이에요.
시장의 우상은 말이 모호해서 생기는 혼란이에요.
극장의 우상은 권위자의 말을 무조건 믿는 태도예요.
그리고 대안으로 귀납법을 제시했어요.
귀납법이란, 결론을 먼저 세우고 논리로 증명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먼저 모으고 거기서 규칙을 끌어내는 방식이에요.
오늘날 직장 상사가 "데이터로 보여줘"라고 할 때의 그 논리예요.
하지만 당시로선 혁명적인 주장이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가 2천 년이나 쌓인 시대에, 베이컨은 그 모든 걸 잊고 처음부터 관찰하라고 말한 거니까요.

베이컨을 출세시킨 사람을, 베이컨이 직접 사형대로 보냈어요.
에식스 백작.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총신으로, 젊은 베이컨을 정치권으로 이끌어준 후원자예요.
그런데 1601년, 에식스 백작이 반역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어요.
그리고 검사석에 선 인물이 바로 베이컨이었어요.
자기 후원자를 기소하러 나선 거예요.
베이컨은 왕실 편에서 에식스를 몰아붙였어요.
에식스는 그해 참수됐어요.
오늘날로 치면, 자기를 회사에 데려온 선배가 위기에 빠졌을 때 회사 편에 서서 직접 그를 자른 부하 직원의 장면이에요.
베이컨은 훗날 이 일을 후회한다는 기록을 남겼지만, 그게 에식스를 살리진 못했어요.
아이러니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그로부터 20년 뒤인 1621년, 베이컨은 영국 최고 법관인 대법관 자리에 오른 상태였어요.
그런데 이번엔 베이컨 본인이 의회 탄핵을 받았어요.
23건의 뇌물 수수 혐의였어요.
"지식이 힘이다(Knowledge is power)"를 외친 사람이에요.
하지만 권력의 사다리에서 은인을 짓밟고, 결국 그 권력에 스스로도 무너진 거예요.
베이컨이 상상으로만 그린 연구소가, 그가 죽고 한 세대 만에 실제로 지어졌어요.
죽기 직전, 베이컨은 미완성 소설을 하나 남겼어요.
제목은 『새로운 아틀란티스』.
상상 속의 섬 나라에서 국가가 운영하는 거대 연구소 '솔로몬의 집'이 등장해요.
솔로몬의 집은 수백 명의 연구자가 분업해 자연을 탐구하고, 그 결과를 국가 발전에 쓰는 기관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국립과학원 같은 곳이죠.
베이컨은 추문 속에 사망하고 불명예 퇴직자로 역사에 남는 듯했어요.
하지만 그가 죽은 지 34년이 지난 1660년, 런던에서 영국 왕립학회(Royal Society)가 창립됐어요.
창립자들은 베이컨을 자신들의 정신적 시조로 공개 선언했어요.
솔로몬의 집이 현실이 된 거예요.
왕립학회 이후 뉴턴, 보일, 훅 같은 과학혁명 세대가 쏟아져 나왔어요.
이들 모두 베이컨의 후예를 자처했어요.
부패 정치인으로 낙인찍혀 죽은 사람이, 사후 한 세대 만에 근대 과학의 설계자로 부활한 거예요.
닭 배 속에 눈을 채우던 그 추운 오후가, 결국 오늘날의 과학이 시작된 순간이었어요.
자기 목숨을 걸고 냉장 원리를 검증한 노인이, 수백 년 뒤 교과서 첫 줄에 올라가리라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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