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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113년 봄, 23세의 부르고뉴 귀족이 친척과 친구 30명을 데리고 무너져가던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다.
그냥 입회가 아니었다.
친형 4명, 삼촌, 가문의 친척과 벗들까지 전부 직접 설득해서 함께 데려온 것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이런 장면이다.
명문대 졸업을 앞둔 청년이 취업 대신 산속 존폐 위기 공동체에 들어가면서, 형제들과 친구 수십 명을 "같이 가자"며 끌고 가는 것.
보통 사람이라면 부모님한테도 꺼내기 어려운 말이다.
더 이상한 건 그가 고른 수도원이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클뤼니 수도원이라는 명성 높은 곳이 있었다.
클뤼니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권위 있는 수도원으로, 귀족 자제들이 선호하는 엘리트 코스였다.
그런데 베르나르는 그 대신 시토(Cîteaux) 수도원을 골랐다.
시토는 창립 15년도 안 된 신생 공동체였고, 규율이 너무 가혹해 지원자가 없어 존폐 위기였다.
당시 수도원장은 "이대로면 우리가 모두 죽은 뒤 이 수도원도 함께 사라지겠구나"라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베르나르가 가족과 친구들을 설득하는 데 쓴 말은 단순했다.
"우리는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 한 마디가, 30명을 움직였다.

베르나르가 죽었을 때 시토회 수도원은 339개로 늘어 있었다.
그가 처음 문을 두드리던 해, 시토는 곧 문을 닫을 참이었다.
입회한 지 2년 만인 1115년, 25세의 베르나르는 수도사 12명을 이끌고 북프랑스의 황량한 계곡으로 갔다.
그 계곡에 새 수도원을 세웠고, 이름을 클레르보(Clairvaux), '맑은 골짜기'라 붙였다.
그가 초대 원장이 됐다.
클레르보가 베르나르 생전에 직접 파견해 세운 분원만 68개였다.
시토회 전체로는 339개.
망해가던 신생 공동체에 한 사람이 합류했더니 수십 년 만에 유럽 전역에 수백 개 지점이 생긴 격이다.
베르나르가 남긴 편지만 500통이 넘는다.
교황, 황제, 주교, 귀족들한테 직접 쓴 것들이다.
그는 수도원 담장 안에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유럽 전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베르나르가 18년에 걸쳐 한 86편의 설교는 모두 한 권의 책, 그것도 가장 관능적인 사랑 노래에 관한 것이었다.
〈아가서〉는 구약성경 안에 있는 짧은 시집이다.
"그가 나에게 입맞추기를"로 시작하는 그 책은 신학 논문이 아니라 신랑신부의 사랑 노래다.
솔직히 말해서, 연애시에 가깝다.
그런데 가장 엄격한 금욕주의 수도원의 원장이 이 책을 18년 동안 수도사들 앞에서 읽고 또 읽으며 풀어냈다.
베르나르는 아가서의 신랑신부를 하느님과 인간 영혼의 관계로 해석했다.
"입맞춤은 영혼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순간"이라고 그는 썼다.
그 86편은 라틴어로 묶여 〈아가서 강해(Sermones super Cantica Canticorum)〉라는 책이 됐다.
중세 이후 '신비 신학', 즉 신을 논리가 아닌 내면의 직접적인 경험으로 만나려는 사상의 원형이 됐다.
하지만 베르나르는 아가서 2장 절반까지만 설교하고 1153년 세상을 떠났다.
18년이 지났는데 책 한 권을 절반도 끝내지 못한 채 강의가 끝난 것이다.
그 미완성이 오히려 이 설교집을 더 살아있게 만든다.
완결된 체계가 아니라, 끝없이 파고드는 한 사람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1146년 베르나르의 한 마디에 십자군이 일어났다.
2년 뒤 그 군대가 무너지자, 그는 그 책임을 자신의 것이라 적었다.
2차 십자군은 유럽 기독교 세계가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며 벌인 두 번째 대규모 원정이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가 베르나르에게 설교사로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에우제니오는 베르나르의 옛 제자였다.
베르나르는 프랑스 베즐레와 독일 슈파이어에서 군중 앞에 섰다.
프랑스 왕 루이 7세가 그 자리에서 참전을 선언했고, 독일 황제 콘라트 3세도 합류했다.
수만 명이 움직였다.
하지만 1148년 원정군은 다마스쿠스 포위에서 처참히 실패하고 철수했다.
2차 십자군은 지금도 서유럽 군사사에서 가장 빠르게 붕괴한 원정 중 하나로 꼽힌다.
그때 베르나르가 한 일이 놀랍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 바치는 책 〈성찰에 관하여(De Consideratione)〉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판단이 아니라 죄가 이것을 가져왔다. 그 죄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변명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회피도 없었다.
오늘날 자신이 부추긴 프로젝트가 망하면 공개적으로 "제 책임입니다"라고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베르나르는 1153년 세상을 떠났고, 죽은 지 21년 만에 성인으로 시성됐다.
그를 두고 '마지막 교부'라 부른다.
하지만 18년 동안 책 한 권을 끝내지 못한 채 강의실을 떠난 사람을, 과연 무언가를 '끝낸'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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