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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콩도르세가 그 책을 쓸 때, 그를 잡으면 단두대로 보낼 사람들이 파리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1793년 7월, 파리 어느 하숙집의 다락방이었다.
마담 베르네라는 집주인이 콩도르세를 숨겨주고 있었다.
창밖에는 혁명 경찰이 그를 찾아 돌아다녔고, 발각되면 재판도 없이 단두대였다.
그런데 콩도르세는 그 공간에서 책을 썼다.
제목은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자기를 죽이려는 혁명을 인류가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로 묘사한 책이었다.
비유하면 이렇다.
자기를 해고하려는 회사 안에서 "이 회사는 곧 위대해질 것이다"라는 책을 쓰는 직원.
그것도 9개월 동안.

잃을 게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먼저 혁명을 외쳤다.
콩도르세는 피카르디의 후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17세에 수학 논문을 발표했고, 22세에 달랑베르의 후원으로 학계에 진입했다.
달랑베르는 당시 프랑스 최고의 지식인 집단인 백과전서파의 수학자로, 신과 왕보다 이성과 지식이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고 믿었던 계몽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콩도르세는 볼테르와 교류하며 그 운동의 중심이 됐다.
볼테르는 18세기 프랑스의 대표 지식인으로, 종교 권력과 전제 군주를 거침없이 비판한 사람이다.
귀족 출신이 계몽주의 급진파와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상한 조합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터졌다.
혁명은 귀족 제도 자체를 부수는 일이었다.
그러면 후작 콩도르세는 가장 먼저 도망쳐야 할 처지였지만, 그는 반대로 입법의회 의원이 됐고 여성 참정권과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다.
그 당시 여성 참정권은 급진 중의 급진이었다.
대기업 임원이 자기 회사의 해체를 가장 먼저 주장하는 꼴이었다.
작위도, 재산도 혁명의 이상 앞에 던진 셈이었다.

콩도르세를 죽인 것은 왕정도 반동도 아니었다.
그가 함께 세운 혁명이었다.
1793년, 혁명의 주도권이 과격파 자코뱅으로 넘어갔다.
자코뱅은 혁명 내부의 강경 세력으로, 반대파를 단두대로 보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이 새 헌법 초안을 밀어붙였는데, 콩도르세가 먼저 작성한 초안과 방향이 달랐다.
콩도르세는 그 헌법을 공개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헌법은 공화국이 아니라 혁명의 독재를 위한 것이야."
그 결과 6월에 체포령이 내렸다.
10월에는 '법의 바깥(hors la loi)'으로 선포됐다.
법의 바깥이란 체포 즉시 재판 없이 처형된다는 뜻이다.
자기가 만든 동아리 규정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창립자가 동아리에서 쫓겨나는 것과 같았다.
콩도르세는 도망쳤다.
동지였던 이들의 손에 쫓기면서, 그래도 책을 놓지 않으면서.

콩도르세는 책을 마치고 며칠 뒤 감옥에서 죽었다. 책은 살아남았다.
1794년 3월, 9개월의 은신 생활 끝에 콩도르세는 파리 외곽 시골 마을에서 신원이 발각됐다.
체포됐고, 다음 날 부르라렌 감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자살인지 독살인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원고를 살린 것은 그의 아내 소피 드 그루시였다.
번역가이자 파리 살롱을 운영했던 그녀는 1795년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를 출간했다.
살롱은 당시 지식인들이 모여 토론하는 사적 공간으로, 소피는 그 중심에 있었다.
이 책은 이후 200년의 진보 사상에 뿌리가 됐다.
오귀스트 콩트는 사회과학의 씨앗을 이 책에서 찾았고, 마르크스는 역사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확신의 근거로 삼았다.
20세기 인권 운동과 민주주의 이론에도 그 흔적이 남았다.
죽기 직전 다락방에서 쓴 원고가 다음 세대의 필독서가 됐다.
콩도르세가 살아서 그 사실을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봐, 내가 맞았잖아"라고 했을까, 아니면 그 진보가 자신을 죽인 혁명을 통과해 왔다는 사실에 그냥 말을 잃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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