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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헤르더는 칸트가 가장 아끼던 제자였다.
그리고 칸트의 이성을 가장 강하게 무너뜨린 사람이었다.
1762년, 헤르더는 쾨니히스베르크라는 독일 동부 도시에서 임마누엘 칸트의 강의를 들었다.
칸트는 "모든 인간은 동일한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발전시키고 있었고, 헤르더는 그 강의에 완전히 매료됐다.
스승과 제자는 이후 수십 년을 서로 다른 도시에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1799년, 헤르더는 칸트의 대표작 『순수이성비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을 세상에 내놨다.
제목은 『순수이성비판 메타비판』이었다.
평생 존경하던 교수님과 졸업 후 학회에서 정면으로 논쟁하게 된 제자, 그 처지와 정확히 같다.
헤르더의 주장은 이렇다.
"이성은 언어 안에서만 작동해. 그런데 언어는 민족마다 달라. 그러면 이성이 어떻게 보편적일 수 있어?"
칸트가 "이성은 국적도 문화도 초월한다"고 한 반면, 헤르더는 "이성은 당신이 어떤 언어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맞섰다.
이건 단순한 학문적 논쟁이 아니었다.
칸트의 이성 중심 철학은 당시 유럽 지식인들이 공유하던 세계관의 토대였다.
그 토대에 제자가 망치를 들고 달려든 것이다.

헤르더는 도서관이 아니라 시골 술집에서 민족의 영혼을 찾았다.
1778년, 헤르더는 『민중의 목소리 속의 노래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유럽 각지에서 농민들이 부르던 민요를 직접 모아 엮은 모음집이었다.
그는 이 노래들을 "민족의 살아 있는 문서"라고 불렀다.
당시 유럽 지식인들의 기준은 달랐다.
라틴어를 얼마나 잘 쓰느냐, 프랑스어로 얼마나 세련되게 말하느냐가 교양의 척도였다.
그 시대에 "시골 아낙의 자장가가 궁정 시인의 운문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건 거의 도발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이런 상황이다.
"서울대 논문보다 할머니가 부르던 노래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더 잘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헤르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민요에는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수백 년에 걸쳐 쌓아온 감정, 기억, 세계를 보는 방식이 담겨 있었다.
어떤 철학 논문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었다.
독일 문학을 바꾼 사람은 괴테였지만, 괴테를 바꾼 사람은 헤르더였다.
1770년 겨울,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스물다섯 살 청년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다섯 살 위인 헤르더를 만났다.
당시 헤르더는 안과 수술을 받고 병실에서 회복 중이었다.
괴테는 그 병실에 한겨울 내내 드나들었다.
헤르더는 눈을 붕대로 감은 채 괴테에게 책을 읽어줬다.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 영국의 셰익스피어, 그리고 알자스 지방 농부들이 부르던 민요를 함께 읽었다.
이건 대학 강의실에서 배우는 내용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만남 직후, 괴테의 글이 달라졌다.
그때까지 그는 프랑스 고전주의 방식을 모방하며 세련된 운문을 쓰려 했다.
하지만 헤르더를 만난 뒤 독일어로 자기 감정을 직접 쓰기 시작했다.
결국 그 전환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낳았고, 질풍노도 운동으로 이어졌다.
질풍노도는 18세기 후반 독일에서 일어난 문학 운동으로, 이성보다 감정, 규칙보다 개인의 내면을 앞세우자는 흐름이었다.
무명 대학생이 우연히 만난 선배에게 한 학기 영향을 받고 인생 방향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히틀러가 인용한 헤르더는, 헤르더가 평생 반대했던 헤르더였다.
헤르더는 폴크스가이스트, 즉 '민족정신'이라는 개념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하다.
각 민족에는 고유한 언어와 문화와 역사가 있고, 그 안에서 형성된 독특한 정신이 있다는 생각이다.
19세기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이 개념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헤르더가 실제로 한 말은 달랐다.
그는 1784년부터 쓴 『인류 역사 철학에 대한 이념』에서 이렇게 비유했다.
"모든 민족은 인류라는 정원의 각기 다른 꽃이야. 꽃들은 각자의 색으로 피어나야 해. 한 꽃이 다른 꽃을 지배하면 그건 정원이 아니라 잡초 밭이야."
하지만 19세기 민족주의자들과 20세기 나치는 그의 개념에서 '각 민족은 고유하다'는 절반만 가져갔다.
나머지 절반, '그러므로 어떤 민족도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말은 버렸다.
결국 헤르더의 언어로 헤르더가 가장 증오했을 주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내가 쓴 글의 한 문장만 잘라 정반대 주장의 근거로 누군가 인용하는 상황.
헤르더는 그것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고 1803년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텍스트는 그 뒤 100년 이상 그 방식으로 이용됐다.
이성보다 감정을, 보편보다 고유를, 라틴어보다 민요를 옹호했던 사람.
그가 만든 언어가 결국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을 낳는 데 쓰였다.
헤르더라면 그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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