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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노벨상을 받은 다음 날, 마흔네 살의 카뮈는 인류의 정의를 거절했다.
그가 지키려 한 것은 알제의 한 늙은 가정부였다.
1957년 12월, 노벨문학상 시상식 직후 스웨덴 대학생 한 명이 카뮈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왜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폭탄 테러를 지지하지 않습니까?"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은 프랑스 식민 지배에 맞서 무장 독립을 요구하던 조직이었다.
그들은 독립을 위해 민간인이 오가는 거리와 시장에 폭탄을 설치했다.
많은 유럽 좌파 지식인들은 이를 억압에 맞선 정당한 저항이라 불렀다.
카뮈의 답은 단 두 문장이었다.
"나는 정의를 믿는다. 하지만 정의보다 먼저 내 어머니를 지킬 것이다."
그 순간 그의 어머니는 폭탄이 터지는 알제 빈민가에 살고 있었다.
'인류를 위한 정의'와 '지금 우리 엄마가 안 다쳤으면'이라는 소원이 충돌하는 순간,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부조리에 맞선 반항을 평생 외쳐온 사상가가 가장 큰 정치 무대에서 추상적 정의를 거부한 것이다.

카뮈가 평생 한 줄도 읽어주지 못한 독자가 한 명 있었다.
그의 어머니였다.
카트린 생테스는 문맹이었고 청각장애도 있었다.
카뮈의 아버지는 그가 한 살 때 1차 세계대전의 마른 전투에서 전사했고, 어머니는 알제 빈민가에서 가정부로 일하며 혼자 아이들을 키웠다.
세계가 카뮈의 문장을 읽는 동안, 그가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한 사람은 그의 어떤 책도 읽을 수 없었다.
책 앞에 '어머니께 바칩니다'라고 써도, 그 헌사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마지막으로 쓰던 책이 어머니에게 바치는 자전적 소설이었던 것은.
노벨상 작가가 된 그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읽어드리지 못한 아들이었다.

카뮈는 친구 한 명을 잃었다.
그 친구의 이름이 사르트르였다.
장폴 사르트르는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였다.
두 사람은 파리의 카페 드 플로르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가장 가까운 지식인 동료였다.
카페 드 플로르는 당시 파리 좌파 지식인들의 아지트 같은 카페였다.
1951년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을 출간했다.
공산주의 혁명이 내세우는 폭력을 정면으로 비판한 사상서였다.
혁명을 위한 폭력이라도 폭력은 폭력이라는 주장은, 당시 좌파 지식인 사회에 폭탄 같은 도발이었다.
사르트르가 운영하던 잡지 '레 탕 모데른'이 카뮈를 맹렬히 공격했다.
레 탕 모데른은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의 대표적인 비평 매체였다.
결국 1952년 8월, 사르트르 본인이 직접 공개 절교 편지를 잡지에 실었다.
'함께 부조리에 맞서자'고 약속했던 두 친구는 폭력을 정당화할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갈라섰다.
카뮈는 어느 쪽 폭력도 정당화하지 않는 길을 택했고, 그 대가로 좌파 지식인 사회에서 추방됐다.
내가 옳은 말을 했는데 가장 친한 친구가 나를 공개 저격한 것과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고 현장에서 두 가지가 발견됐다.
그가 타지 않은 기차표, 그리고 어머니에게 바치는 미완의 책이었다.
1960년 1월 4일 오후, 알베르 카뮈는 출판사 사장 미셸 갈리마르의 자동차로 파리를 향하고 있었다.
원래는 기차를 탈 예정이었다.
하지만 갈리마르가 같이 가자고 했고, 카뮈는 기차표를 외투 주머니에 넣은 채 차에 올랐다.
빌블르뱅 부근 가로수에 차가 부딪혔고, 마흔여섯 살의 카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진흙 속에는 원고 뭉치가 흩어져 있었다.
제목은 '최초의 인간', 평생 책을 읽어주지 못했던 어머니에게 바치는 자전적 소설이었다.
부조리를 평생 사유한 작가가 가장 부조리한 우연으로 죽었다.
그날 기차를 탔더라면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리고 진흙 속에 흩어진 미완의 원고를, 어머니는 끝내 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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