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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776년 페인이 쓴 팸플릿은 3개월 만에 12만 부가 팔렸어요.
그가 챙긴 인세는 0달러였어요.
그 팸플릿 이름이 '상식(Common Sense)' 이에요.
지금 들으면 밋밋하게 들리지만, 1년 만에 50만 부가 팔렸거든요.
당시 미국 식민지 전체 인구가 250만 명이었어요.
가정마다 한 권꼴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한국 국민 전체가 3개월 안에 같은 책을 읽은 거예요.
그런데 페인은 그 수익을 단 한 푼도 챙기지 않았어요.
모든 인세를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에 기부했거든요.
대륙군이란 영국 왕실에 맞서 싸우던 식민지 군대예요.
결국 페인 자신은 평생 가난했어요.
베스트셀러 작가가 인세를 전액 기부하고 죽을 때까지 빈털터리로 산 거예요.
독립혁명의 펜이 된 사람은 1년 전까지 영국에서 두 번 해고된 세무 공무원이었어요.
토마스 페인은 1737년 영국의 작은 마을 셋퍼드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코르셋을 만드는 장인이었고, 페인도 한동안 같은 일을 했어요.
코르셋이란 당시 귀부인들이 허리를 조이기 위해 착용하던 속옷 틀로, 고래 뼈로 뼈대를 만들었어요.
그 뒤 세무 공무원으로 직종을 바꿨어요.
하지만 거기서도 잘 풀리지 않았어요.
직장에서 두 번 해고당하고, 첫 번째 아내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두 번째 아내와는 결별했어요.
37세에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어요.
영국에 있던 벤저민 프랭클린이 추천장 한 장을 써줬거든요.
프랭클린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당시 이미 국제적으로 명망 높은 과학자이자 외교관이었어요.
페인은 그 추천장 한 장만 들고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으로 건너갔어요.
그리고 딱 14개월 뒤에 '상식'을 썼어요.
직장에서 두 번 잘리고 두 번의 결혼도 실패한 37살이, 외국에 도착한 지 1년 만에 그 나라의 역사를 바꾼 거예요.

1794년 7월 어느 새벽, 분필이 페인의 감방 문에 잘못 표시되었어요.
그 실수가 그를 살렸어요.
'상식'으로 미국 독립혁명에 불을 붙인 페인은 이번엔 프랑스로 향했어요.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자유의 바람이 유럽 전체로 퍼져야 한다고 믿었거든요.
1792년 프랑스 시민권을 받고 국민공회 의원까지 됐어요.
국민공회란 프랑스 혁명 이후 새로 구성된 의회예요.
그 안에서 페인은 결정적인 선택을 했어요.
루이 16세의 처형에 반대 의견을 낸 거예요.
"왕을 죽이는 대신 미국으로 추방하자"는 게 페인의 주장이었어요.
하지만 혁명 과격파인 자코뱅 세력은 그걸 배신으로 봤어요.
자코뱅이란 급진적인 공화파로, 당시 프랑스 혁명의 실권을 장악한 집단이에요.
결국 1793년 12월, 페인은 룩셈부르크 감옥에 갇히고 처형 명단에 올랐어요.
처형 전날 밤 간수들은 처형할 감방 문 바깥쪽에 분필로 'X' 표시를 했어요.
그런데 페인의 방 문이 마침 안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어요.
간수가 열린 문의 안쪽 면에 표시를 했고, 다음 날 아침 복도를 걸을 때 그 문 바깥에는 표시가 보이지 않았어요.
며칠 뒤, 혁명의 핵심 인물 로베스피에르가 권력에서 실각했어요.
공포정치가 끝나면서 페인은 감옥 밖으로 나왔어요.
미국 독립에 기름을 부은 사람이 프랑스 혁명에서 그 혁명에 의해 죽을 뻔한 아이러니였어요.
1809년 페인의 장례식에 온 사람은 6명이었어요.
그를 묻은 자리는 지금 비어 있어요.
1802년 페인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어요.
하지만 그를 기다린 건 환영이 아니었어요.
감옥에 있는 동안 쓴 책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 때문이었어요.
이 책에서 페인은 기독교를 포함한 제도권 종교 전반을 강하게 비판했어요.
그는 이신론자였어요. 이신론이란 신이 세상을 만든 뒤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는 생각이에요. 마치 시계공이 시계를 만들어 태엽을 감아두면 이후엔 알아서 돌아가는 것처럼요.
사람들은 그걸 무신론으로 받아들였어요.
'상식'으로 독립의 정신적 토대를 만든 사람이 이제는 "신을 부정한 자"로 낙인찍힌 거예요.
언론은 조롱했고, 지인들은 하나둘 등을 돌렸어요.
1809년 뉴욕 뉴로셸에서 숨을 거뒀을 때, 장례식 참석자는 단 6명이었어요.
그중 두 명은 흑인 추모객이었어요.
페인이 노예제 폐지를 일찍부터 주장한 논객 중 한 명이었기에, 오히려 그들이 마지막까지 찾아온 거예요.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10년 뒤, 영국 언론인 윌리엄 코빗이 페인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며 유골을 파내 영국으로 가져가려 했어요.
하지만 유골은 배 위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고, 지금까지도 토마스 페인의 무덤은 어디에도 없어요.
독립혁명을 촉발한 팸플릿을 쓰고, 인세를 군대에 기부하고, 프랑스 혁명에도 뛰어들었다가 분필 오표시 하나로 목숨을 건진 사람.
그의 유골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어쩌면 그의 삶을 가장 잘 요약하는 문장일지도 모르겠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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