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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그는 영웅의 편지를 읽었고, 영웅을 잃었어요.
1345년,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이탈리아 베로나 대성당 도서관에서 먼지 쌓인 양피지 묶음을 발견해요.
그것은 로마 최고의 웅변가 키케로가 친구 아티쿠스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들이었어요.
천 년 넘게 아무도 읽지 않았던 원본을 처음 손에 쥔 사람이 바로 그였어요.
페트라르카에게 키케로는 그냥 위인이 아니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존재, 인생의 나침반이었어요.
그런데 그 사적인 편지 안에는 전혀 다른 키케로가 있었어요.
공식적으로는 공화정의 수호자를 외쳤지만, 뒤에서는 권력자에게 줄을 대고 자기 안위를 챙기는 정치 기회주의자였어요.
오늘로 치면, 평생 팬으로 살아온 작가의 미공개 일기장을 발견했더니 그 안에 전혀 다른 인간이 있는 거예요.
페트라르카는 그 충격을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그는 책상에 앉아 편지를 썼어요.

그는 답장이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우표를 붙였어요.
페트라르카는 분노를 가슴에 묻지 않았어요.
키케로에게 직접 항의 편지를 썼어요.
천 년 전에 죽은 사람에게요.
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물었어요.
"키케로, 당신은 왜 스스로 당신의 글이 가르치는 방식으로 살지 않았나요?"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았어요.
베르길리우스, 호메로스, 세네카, 리비우스까지, 고대 작가 19명에게 연달아 편지를 보냈어요.
이 편지들은 그가 평생 써 모은 『친근 서한집』 마지막 권에 '고대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묶여 있어요.
좋아하는 작가의 SNS에 댓글을 다는 행위와 비슷한데, 다만 상대가 1400년 전에 죽었을 뿐이에요.
당시는 성경과 신학이 모든 지식의 기준이었던 시대예요.
인간의 말보다 신의 말씀이 우선이었어요.
그런데 페트라르카는 "그래도 나는 고대 사람들과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선언한 거예요.
시간의 벽을 부수고 고전과 대화하겠다는 이 행위가, 훗날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출발점이 되어요.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신이 아닌 인간의 언어와 역사를 학문의 중심에 놓으려는 운동이에요.
페트라르카는 그 운동의 아버지가 됐어요.

그는 정상에서 바람 대신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들었어요.
1336년 4월 26일, 페트라르카는 동생과 함께 프랑스 남부 방투산을 올라요.
해발 1912미터, 바람이 거센 바위산이에요.
역사가들은 이 등반을 "쾌락을 위해 산에 오른 최초의 근대인의 행동"이라고 기록해요.
그전까지 사람들이 어딘가를 간다는 건 순례나 전쟁이었지, 경치를 보려고 산을 오르는 건 생각 자체를 안 했거든요.
그런데 페트라르카는 그냥 올라갔어요.
보고 싶어서요.
정상에 도착한 그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어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었어요.
아우구스티누스는 4~5세기 기독교 신학자로, 유럽에서 가장 먼저 자기 내면을 솔직하게 파고든 자기 고백 문학을 남긴 사람이에요.
그가 무작위로 펼친 페이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어요.
"사람들은 산의 높이와 바다의 거대함에 감탄하면서, 정작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잊는다."
순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기록했어요.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찍으러 산 정상에 갔다가, 거기서 자기 인생이 얼마나 공허한지 깨달아버린 순간과 같아요.
고전 세계의 부활을 꿈꾼 사람이 정상에서 받은 것이 중세 기독교의 꾸짖음이었던 거예요.
그는 그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산에서 내려와 그 경험 전체를 편지로 남겼어요.

그는 자기 시대를 어둠이라 부른 죄로 새로운 시대의 아버지가 됐어요.
페트라르카는 자기가 살고 있던 시대를 직접 가리켜 '어둠(tenebrae)'이라 불렀어요.
반면 천 년 전 로마 시대는 '빛'이라고 불렀어요.
이른바 '암흑시대(Dark Ages)'라는 표현을 처음 만든 사람이 바로 그예요.
자기가 숨 쉬는 공기를 부정하고 천 년 전 죽은 사람들의 세계로 돌아가려 한 셈이에요.
그런데 바로 이 행위가 역설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어요.
"지금은 가짜고 진짜는 옛날에 있었다"고 외친 사람이, 그 외침 자체로 중세와 단절한 최초의 인물이 된 거예요.
1341년 4월 8일 부활절, 페트라르카는 로마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계관시인 칭호를 받아요.
계관시인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에게 월계수 화관을 씌워주던 칭호예요.
고대 로마가 무너진 이후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부활한 의식이었어요.
그가 그토록 살리고 싶었던 로마의 전통이, 그를 통해 처음으로 숨을 쉰 순간이었어요.
한 시대가 끝나고 다음 시대가 시작되는 그 틈새에서, 뒤를 돌아보며 앞으로 걸어간 사람이었어요.
천 년 전 죽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던 그 기괴한 행위가 결국 유럽의 방향을 바꿨다면, 당신이 오늘 혼자 품고 있는 이상한 집착도 어쩌면 그냥 집착이 아닐 수 있지 않을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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