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가장 사적인 공간의 설계가 한 나라의 사유 방식을 그대로 베낀다는 주장이에요.
슬라보예 지젝은 1997년 무렵, 독일·프랑스·영미식 변기 모양을 비교한 짧은 글을 썼어요.
그냥 문화 에세이가 아니었어요.
독일식 변기에는 앞쪽에 선반이 있어요.
배변물이 그 선반에 잠시 머물러요.
지젝은 이걸 독일 특유의 성찰 문화로 읽었어요. 보고 나서 버리는 방식이요.
프랑스식은 곧장 뒤로 흘려보내요.
과거를 단번에 날려버리는 혁명적 충동이라는 거예요.
영미식은 물 위에 띄우는데, 가까이도 멀리도 아닌 어중간한 거리감이에요.
이데올로기는 선전 포스터나 거창한 연설 속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이데올로기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 속에 숨어있어요.
변기처럼, 매일 쓰면서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것들이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슬로베니아인은 정작 자기 나라 대학 강단에 설 수 없었어요.
1981년,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랴나 대학이 지젝의 박사논문을 거부했어요.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었어요.
그래서 지젝은 파리로 건너갔어요.
파리8대학에서 자크-알랭 밀러의 지도 아래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밀러는 20세기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사위이자, 라캉 이론을 체계화한 핵심 인물이에요.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채워지는 게 아니라 언제나 다른 무언가를 향해 미끄러진다고 본 사람이에요.
지젝은 이 라캉을 평생의 렌즈로 삼았어요.
그런데 파리에서 돌아와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슬로베니아는 오랫동안 그에게 정규 교수직을 주지 않았어요.
결국 그는 대학 강단 바깥의 연구원으로 수십 년을 보냈어요.
그의 책은 지금 50개 언어로 번역돼 있어요.
하지만 그 명성이 쌓이던 시절, 그는 강의실이 아니라 연구소 구석에 있었어요.
이데올로기를 책으로만 비판하던 철학자가 직접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렸어요.
1990년, 유고슬라비아 해체 직전에 슬로베니아 최초의 다당제 대통령 선거가 열렸어요.
유고슬라비아는 슬로베니아를 포함한 여섯 공화국이 묶인 동유럽 사회주의 연방이었어요.
지젝은 자유민주당 후보로 출마 신청서를 냈어요.
결과는 5위 낙선이었어요.
하지만 이 사건의 무게는 결과에 있지 않아요.
라캉을 강의하고 헤겔을 인용하던 사람이 선거 운동을 한 거예요.
헤겔은 역사는 모순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고 본 19세기 독일 철학자예요.
책상 앞에서 세상을 분석하는 것과, 그 세상 안에 실제로 뛰어드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에요.
지젝의 출마는 그 차이를 직접 몸으로 살아낸 선택이었어요.

가장 난해한 두 철학자를 설명하기 위해, 지젝은 도서관 대신 영화관으로 갔어요.
히치콕의 스릴러, 매트릭스, 타이타닉 같은 할리우드 영화 장면을 강의 재료로 가져왔어요.
헤겔과 라캉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영화를 본 사람에게 말을 건 거예요.
2006년 다큐멘터리 <퍼버트의 영화 가이드>가 그 절정이에요.
이 작품은 지젝이 영화 장면들을 정신분석학 개념으로 읽어내는 강의 다큐멘터리예요.
그는 영화 속 세트를 직접 재현해서, 보트 위에 누운 채로, 침대에 앉은 채로 카메라를 향해 강의했어요.
어려운 개념을 더 쉬운 말로 바꾼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이미 몸으로 느낀 적 있는 장면과 연결한 거예요.
그게 지젝의 유튜브 강연이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하는 이유예요.
변기에서 시작해서 영화관까지, 그는 철학이 일상 바깥에 있다는 생각 자체를 거부했어요.
그래서 하나만 물을게요.
당신이 오늘 아무 생각 없이 스크롤하며 지나친 것들, 정말 아무 의미가 없는 걸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2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