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부조리한 세계에서도 살아야 하는 이유 | 지혜의 빛 : 인문학의 숲
원본 영상: 알베르 카뮈 - 부조리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 지혜의 빛 : 인문학의 숲
카뮈는 부조리한 삶 앞에서 답이 자살도 종교적 희망도 아닌 반항이라고 말한다. 이유도 의미도 주지 않는 세계와, 그럼에도 이유를 찾으려는 인간 사이의 어긋남, 그것이 그가 평생 파고든 부조리다. 이 글은 카뮈의 삶과 대표작 이방인, 그리고 시지프 신화를 통해 그가 이 어긋남을 어떻게 풀어냈는지 정리한 영상을 글로 옮긴 것이다. 1960년 자동차 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그의 마지막 순간부터,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결론까지 순서대로 따라가 본다.
예정에 없던 죽음, 가난에서 시작된 삶

사랑하는 사람과는 왜 헤어져야 하고, 미워하는 사람과는 왜 자꾸 마주쳐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1960년 1월 4일 파리를 향해 달리던 자동차 한 대를 먼저 봐야 한다. 그 차 안에는 이유도 모른 채 갑작스러운 사고를 맞이하게 될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왜 태어나고 왜 죽는지, 착하게 살아도 평생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나쁜 짓을 하고도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 있는 이유. 인간과 세계 사이에 자리잡은 이 앞뒤 맞지 않는 간극을 평생 파고든 작가가 바로 그 차 안에서 삶을 마감한다. 그의 이름은 알베르 카뮈였고, 그가 맞이한 죽음 역시 그가 평생 말해온 부조리 그 자체였다.
카뮈는 죽기 불과 3년 전인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났을 때 주어진 환경은 작가라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는 포도 농장 노동자였고 1차 세계대전 중 전사했으며, 청각장애가 있던 어머니는 힘든 노동을 도맡으며 말없이 아이들을 키웠다.
카뮈가 태어난 곳은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였고, 이곳에서 하층민 아이들의 진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초등 교육을 마치면 곧바로 노동자가 되는 것, 그것이 가난의 대물림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절의 규칙이었다. 그런데 이 어두운 환경 속으로 빛이 하나 비쳐 든다. 가난했지만 카뮈가 가진 재능을 알아본 담임 선생님 덕분에 그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험에 합격했다.
가난한 재능과 우연한 죽음 사이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모든 걸 갖추고도 작가로 성공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책 한 권 없는 가난한 집에서 자라고도 위대한 작가가 되는 걸까. 전생에 선업을 쌓아서일까, 아니면 신을 잘 믿어서일까. 이런 물음에 우리는 합리적인 답을 내놓기 어렵다.

카뮈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새해 연휴를 마친 그는 원래 기차로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친구가 자기 차로 가자고 제안했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 고속도로를 달리다 사고로 죽음을 맞았다. 이 일 역시 어떤 필연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선한 일에는 선한 결과가, 악한 일에는 악한 결과가 따른다는 합리적인 믿음이 통하지 않는 세계, 그리고 그 세계를 향해 끝내 합리적인 이유를 찾으려 애쓰는 인간. 카뮈는 이 둘 사이의 어긋남을 부조리라 불렀고, 그의 삶 자체가 이 부조리의 증거였다. 이제부터는 그가 평생 파고든 부조리의 철학이 정확히 무엇인지 짚어본다.
세계는 무심할 뿐, 부조리는 그 사이에 있다
프랑스 철학과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 중 카뮈의 책이 꽂힌 서가를 지나쳐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그의 인기는 여전히 높고,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면 바로 부조리다. 1944년 발표한 희곡 칼리굴라에는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의 폭정에 맞선 인물은 인간이란 이유 없이는 삶을 살아갈 수 없으며 아무 이유 없는 살인은 인간이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이유 없는 행위, 의미 없는 삶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그 어떤 이유도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지만 세계는 본래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로 혼자 등산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는 산에서 만나는 나무와 풍경에 감탄하며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런데 산행에 취해 있다 문득 길을 잃고, 해가 지고 찬 바람이 몸을 파고들기 시작하면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나를 행복하게 해주던 그 산은 순식간에 나를 두려움에 빠뜨리는 공간으로 변한다. 결국 그는 아무도 없는 그 산속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이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안타깝다거나 슬프다는 감정을 느끼지만, 정작 산 그 자체는 그 사람이 죽든 살든 아무런 감정도 입장도 갖고 있지 않다. 세계는 우리에게 무심하다. 그래서 칼리굴라는 이런 세계의 성질을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신과 세계의 무의미함을 동일시하며,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자기 죽음에도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게 있다. 세계 그 자체가 부조리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부조리란 본래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뜻인데, 세계는 그냥 그대로 있을 뿐이고 그 세계를 인간이 자기 나름의 윤리와 이치를 들이대며 이해하려 할 때 그 이치가 맞지 않는 지점에서 부조리가 생겨난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하늘과 땅은 사사로운 정이 없어 만물을 풀로 만든 개처럼 대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 역시 세계가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결국 부조리를 느끼는 것은 인간이지, 인간 자체가 부조리한 것은 아니다.
이방인, 무심한 세계를 닮은 남자
부조리는 이제 우리 삶을 향해서도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삶은 살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앞서 본 것처럼 이유도 의미도 없는 삶은 인간에게 견디기 힘든 부조리인데, 카뮈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를 썼다.
그는 이 책 첫머리에서 정말로 진지하게 다뤄야 할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삶을 계속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자살의 문제뿐이라고 말한다. 반면 세계가 몇 차원으로 되어 있는지, 정신이 몇 개의 범주를 가지고 있는지 같은 물음은 그저 장난에 불과하다고 봤다.
쉽게 말하면 지구가 도는지 태양이 도는지를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없지만, 지금 이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두고 고민하다 목숨을 포기하는 사람은 실제로 있다는 뜻이다. 이런 문제의식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카뮈 자신의 경험과 그 시대 분위기가 자리하고 있다.
카뮈는 자신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를 통해 의미 없는 삶, 즉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뫼르소는 세계가 그런 것처럼 특정한 가치관이나 종교적 신념 없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양로원에서 지내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에 가지만 슬픈 감정을 보이지 않는 무심한 태도로 그 자리에 있었고, 장례식 다음 날에는 여자친구와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살던 아파트의 이웃 레몽과 친구가 되면서 평범했던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레몽이 초대한 해변으로 놀러 간 뫼르소는 레몽과 갈등이 있던 아랍인 무리와 마주치고, 그 과정에서 레몽이 다치는 일이 벌어진다. 마음이 답답해진 뫼르소는 혼자 그늘을 찾아갔다가 그 아랍인을 다시 만나게 되고, 그 순간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에 눈이 부신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법정에 선 이방인, 감옥에서 찾은 행복
이 소설의 주인공은 특별한 이유 없이 사람을 죽였다. 그런데 법정에 선 뫼르소를 두고 정작 사람들이 캐묻는 것은 왜 사람을 죽였는가가 아니라, 어머니 장례식에서 보였던 그 이상하리만치 무심한 태도였다.
사회는 종교적 관례를 따르지 않는 그의 행동에 해명을 요구했고, 뫼르소는 오히려 화를 낸다. 그에게는 애초에 변명할 것도 미화할 것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뫼르소는 이방인이 된다. 세계가 자신을 도덕적으로 감싸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세계의 진짜 얼굴인 무관심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모두 이 세계의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만약 뫼르소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로 적당히 변명했다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거짓 대신 이방인이 되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데, 바로 세계의 무심함이 자신과 꼭 닮아 있다는 사실에서 오히려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하다. 앞서 나온 칼리굴라는 삶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이유 없는 살인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까지 의미를 지워버리려 했다. 반면 뫼르소는 굳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의미가 없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캄캄한 감옥 안에서도 행복하기로 마음먹는 순간 그렇게 할 수 있는 선택은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카뮈는 여기서 부조리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적 입장을 드러낸다. 부조리는 그 자체로 나쁘거나 비극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덕분에 우리는 창조적인 존재가 되어 자신의 역사를 써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에 이미 의미가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그 의미를 읽어내느라 여유가 없을 것이고, 존재를 그 의미에 맞춰야 하는 부담 속에서 자유는 오히려 제약받게 된다. 그러므로 부조리한 관계를 의식하지 못한 채 세계의 관습에 몰입해 사는 것보다, 부조리라는 진실을 의식하면서 스스로 선택하는 창조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편이 낫다는 것이 카뮈의 입장이다.
사르트르의 구토, 그리고 실존주의와의 결정적 차이

실존주의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부조리한 세계에서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간다는 앞의 이야기가 사르트르가 말하는 구토 개념과 닮아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는 사르트르의 구토와 상당히 닮아 있는데, 먼저 구토가 무엇인지 짚어보자. 여기 책상이 하나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보통 이 책상을 책을 펼쳐 놓고 쓰는 도구라는 성질로 파악하는데, 이 도구로서의 성질이 사라지는 순간 비로소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책상 그 자체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책상을 의심 없이 곧바로 도구로 여기는 태도는 인간 중심적인 태도이며, 우리는 이런 습관에 매몰된 채 살아간다. 그런데 이 인간 중심적 관점이 무너지면 주변 사물은 나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저 우연히 있는 존재로 다가오고, 심지어 나라는 존재조차 기존의 이해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르트르는 이 낯선 감각을 구토라 불렀는데, 결국 지금까지 말해온 부조리와 같은 것이다.
사르트르는 부조리를 본질적으로 이혼, 곧 절연이라 말했다. 나와 세계가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던 습관적 사고가 무너지고 무심하고 의미 없는 세계의 본모습이 드러날 때 인간과 세계는 이혼하며, 이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부조리다. 이는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데 아무런 이유도 본질도 없다는 사르트르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과도 맞닿아 있는데, 인간은 우연히 세계에 태어나 이후 스스로 의미와 본질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이 생각은 감옥 속에서 자기 행동을 스스로 선택하던 뫼르소의 모습과도 통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카뮈를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하지만, 정작 카뮈 자신의 철학은 실존주의와 분명한 차이가 있었고 그렇게 분류되는 것에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부조리를 느끼는 인간이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격정적으로 삶을 사랑하려는 태도를 잘 보여줬다며 하이데거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들이 부조리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왜곡한다고 비판했다. 부조리를 느끼는 인간이 그 감정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도록 돕는 대신, 부조리 자체를 나쁜 것 혹은 극복해야 할 문제로 보고 없애려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키르케고르가 내놓은 종교로의 도피 같은 방법도 카뮈가 보기엔 부조리를 회피한 것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부조리는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 사이에 있다. 세계 그 자체는 부조리하지 않으며, 합리적 관념을 가진 인간이 그 세계와 관계 맺을 때에만 나타나는 감정이 부조리다. 그러므로 이 감정은 당장은 불편하고 불쾌해도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한 감정인데, 실존주의는 이 관계를 인정하지 않은 채 세계 자체가 부조리하니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카뮈의 철학과 갈라진다.
자살도 희망도 아닌, 반항이라는 답
카뮈는 시지프 신화를 통해 부조리를 느끼며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으로 자살, 희망, 반항 세 가지를 든다. 이 중 자살과 희망은 바람직한 답이 되지 못하며, 오직 반항만이 진짜 답이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자살은 부조리를 만들어내는 두 항, 곧 인간과 세계 가운데 인간의 의식을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답이 될 수 없다고 봤다.
희망은 종교적인 것인데, 인간이 마주한 이 세계를 외면한 채 신이라는 가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역시 제대로 된 답이 되지 못한다고 봤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반항뿐이다. 카뮈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 이야기를 끌어온다.

시지프는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를 속인 죄로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는데, 바위를 올려놓는 순간 그것은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만다. 아무리 애써도 바위를 산꼭대기에 영원히 둘 수 없는 운명임을 알게 된 시지프는, 다시 굴러떨어진 바위를 또 밀어 올릴 수 있는 자기 삶에서 오히려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신이 내린 형벌을 자기 삶의 자부심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카뮈가 말하는 반항이다.
카뮈는 1951년에 낸 철학 에세이 반항하는 인간에서 반항하는 인간을,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거부할지언정 삶을 포기하지는 않는 사람, 그리고 자신에 대한 최초의 확신에서부터 그렇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설명한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이 본질 없이 스스로를 만들어가야 하는 존재라면, 카뮈에게 인간은 자기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결사적으로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존재다.
이렇게 인간에게 반항이란 자기 존엄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부당한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을 향해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 자신의 범위를 넘어서면서까지 권리를 확장하려 할 때 이건 너무하다고 느끼는 감정이 곧 반항이며, 이 감정을 매개로 나와 너 사이에 연대가 가능해진다. 그래서 반항은 개인에서 사회로 확대되는 개념이자 동시에 모두의 숙명 같은 것이고, 카뮈는 이를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는 말로 요약했다.
부조리를 끌어안고 살아가기
오늘 우리는 카뮈의 작품 세계 속에 녹아 있는 부조리의 철학을 자세히 살펴봤다. 반항이라는 개념은 이후 혁명이라는 주제로 훨씬 복잡하게 이어지는데, 이 부분은 다음에 따로 더 자세히 다뤄질 예정이다.
오늘 다룬 내용을 통해 우리는 살아야 할 이유도, 도덕적으로 선해야 할 이유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벌거벗은 세계 속에서 뫼르소가 감옥에서 보여준 선택과, 자기 형벌을 다시 받아들이는 장면을 만났다. 카뮈는 부조리란 피하거나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긍정하고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강의를 계기로 카뮈가 남긴 작품들을 직접 만나보길 권한다. 그의 작품 중에서는 페스트를 가장 좋아하는데, 다음에는 전염병 속에서 부조리한 삶을 다룬 이 작품 페스트를 소개하는 강의로 다시 찾아올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