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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수사학의 아버지로 불린 이 사람은, 평생 단 한 번도 청중 앞에서 입을 열지 않았다.
수사학이란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이에요.
고대 그리스에서는 광장에 나가 목청껏 연설하는 것이 정치 참여의 전부였는데, 그 기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이 정작 평생 단상에 오르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본인이 직접 적었어요.
BC 354년경 쓴 자전적 연설문 '안티도시스'(Antidosis)에서 이소크라테스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목소리가 약하고, 군중 앞에 서면 몸이 떨려 평생 공개 연설을 한 적이 없다."
보컬 트레이너가 무대 공포증 때문에 노래방에서도 마이크를 못 잡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그 트레이너가 그 시대 가장 유명한 선생님이라면?
이게 이소크라테스의 이야기예요.

그는 입 대신 펜으로 그리스를 흔들었다.
해결책은 단순했어요.
연설을 직접 하지 못하면, 연설문을 글로 써서 학생이나 대리인이 낭독하게 하면 되잖아요.
당시로선 꽤 파격적인 방식이었는데, 이소크라테스는 이걸 아예 자기 스타일로 만들었어요.
대표작이 '파네기리쿠스'(Panegyricus)예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서로 싸우지 말고 하나로 뭉쳐 페르시아에 맞서자는 정치 선언문인데, 이걸 완성하는 데 10년이 걸렸어요.
BC 380년에 발표됐으니, 기원전 390년 무렵부터 다듬기 시작한 셈이에요.
라이브 방송을 못 하는 인플루언서가 긴 글 한 편으로 여론을 움직이는 것과 비슷해요.
그런데 그 글이 10년에 걸쳐 완성된 역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말 못하는 웅변가가 글로 정치 담론을 주도하면서, 이소크라테스는 사실상 현대적 의미의 '정치 평론'을 발명한 사람이에요.
플라톤이 철학을 가르치던 그 거리에서, 이소크라테스는 더 많은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BC 393년경 이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 수사학 학교를 세웠어요.
학비가 1000드라크마였는데, 당시 숙련된 장인의 3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수천만 원대 수업료를 받는 대학원 과정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런데도 학생이 몰렸어요.
변론가 이사이오스를 비롯해 당대 정치 엘리트들이 이 학교를 거쳐 갔어요.
같은 시기 플라톤이 아카데미아(Akademia)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실제 정치 영향력과 학생 수에서는 이소크라테스 쪽이 더 컸어요.
같은 거리에 거의 같은 시기 문을 연 두 학원 중, 당대엔 한쪽이 훨씬 잘 나가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100년 뒤엔 반대쪽만 명문으로 기억됐어요.
결국 누가 더 많은 학생을 가르쳤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제자가 더 오래 살아남는 글을 남겼느냐가 역사를 결정했어요.

그가 가장 바라던 일이, 그를 죽였다.
BC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게 패배했어요.
카이로네이아는 지금의 그리스 중부 지역에 있는 평원인데, 이 전투 하나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정치적 자유가 사실상 끝났어요.
각 도시가 스스로 결정권을 갖는 시대가 그날로 막을 내린 거예요.
그 소식을 들은 98세의 이소크라테스는 식음을 전폐했어요.
그리고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어요.
반전이 있어요.
이소크라테스는 평생 필리포스에게 글로 호소했던 사람이에요.
"당신이 그리스를 통합해 페르시아에 맞서야 한다"고,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서로 싸우는 걸 가장 안타까워했고, 강한 지도자가 나타나 하나로 묶어주길 바랐으며, 그 지도자로 가장 기대를 건 인물이 바로 필리포스였어요.
그런데 필리포스는 결국 그리스를 통합했어요.
다만 협력이 아니라 정복으로.
이소크라테스가 평생 지키려 했던 아테네의 자유를 짓밟는 방식으로요.
평생 응원하던 인물이 마침내 권력을 잡았는데, 그 방법이 내가 지키고 싶었던 모든 것을 부수는 것이었을 때, 사람은 무엇을 느낄까요.
이소크라테스는 그 질문의 답을 음식을 끊는 것으로 대신했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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