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과정철학을 창시한 사람이 정작 자신의 과정은 흔적도 남기지 말라 했어요.
1947년 12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숨을 거두자 그의 아내 에블린은 남편의 유언을 실행에 옮겼어요.
개인 편지, 일기, 미발표 원고 전부를 불에 태웠어요.
그는 자신에 관한 전기도 절대 쓰지 말라는 말을 남겼거든요.
오늘날로 치면 이런 거예요.
매일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메모를 올리는 시대에, 죽기 전에 "내 계정, 이메일, 메모장, 전부 영구 삭제해줘"라고 유언한 것과 같아요.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어요.
화이트헤드는 우주의 모든 것이 '되어감(becoming)', 즉 끊임없이 흘러가는 과정이라고 했어요.
고정된 실체 같은 건 없고, 오직 변해가는 흐름만 있다는 게 그의 철학의 핵심이에요.
그러면서 정작 자신의 '되어감'의 흔적은 통째로 지워버렸어요.
철학자가 자신의 철학을 몸으로 증명한 것인지, 아니면 역설을 살아낸 것인지, 알 방법이 없어요.
기록을 태운 덕분에요.
63세 정년 수학자에게 하버드가 보낸 것은 명예교수직이 아니라 철학 정교수 자리였어요.
그 전까지 화이트헤드는 영국 케임브리지의 수학자였어요.
제자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10년에 걸쳐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완성했거든요.
러셀은 훗날 노벨상까지 받은 수학자이자 철학자예요.
『수학 원리』는 1910년부터 1913년 사이에 출간된 세 권짜리 대작으로, 기호논리학으로 수학 전체의 기초를 새로 세우려 한 책이에요.
1924년, 런던대학교에서 정년퇴직한 직후였어요.
하버드 대학교가 그에게 철학 정교수직을 제안했어요.
화이트헤드는 박사학위조차 없이 이를 수락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어요.
정년퇴직한 공대 교수가 갑자기 미국에서 인문학과 교수로 새 인생을 시작한 셈이에요.
보통은 은퇴 후 조용히 쉬거나 명예직이나 받는데, 그는 진짜 새 직업을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이 마지막 23년이 그를 역사에 남게 했어요.
가장 유명한 저작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 1929)』를 포함해, 그의 철학적 대표작들은 전부 이 시기에 나왔어요.
63세까지 수학자로 살다가, 철학자로 마지막 23년을 보낸 사람이에요.

1918년 3월 13일, 화이트헤드의 책상 위로 한 통의 전보가 도착했어요.
막내아들 에릭이 서부전선 상공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었어요.
에릭은 영국 왕립공군(RAF)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격추됐고, 나이는 겨우 19세였어요.
화이트헤드는 이후 가까운 지인에게 편지를 썼어요.
"세상이 잔해(wreckage)가 되어버렸다"는 말을 남겼어요.
그리고 에릭의 사진을 평생 책상 위에 두었어요.
이 죽음이 그의 철학과 무관하지 않아요.
그의 핵심 명제는 이거예요.
모든 순간은 단 한 번뿐이고,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고요.
아이를 잃은 부모가 "왜 그날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평생 안고 사는 것처럼요.
'되어감의 철학'은 추상적 사변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한 사람의 죽음 위에서 자라난 거예요.
모든 것은 두 번 오지 않는다는 명제가,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철학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었을지도 몰라요.
그가 보기에 우주는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두 번 일어나지 않는 사건들의 흐름이었어요.
『과정과 실재』에서 화이트헤드는 세계의 궁극적 단위를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라고 불렀어요.
현실적 계기란 한 번 일어나고 사라지는 경험 사건을 말해요.
돌멩이도, 생각 하나도, 모두 그런 사건의 연속이에요.
이게 왜 대단한 거냐면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2000년 동안 서양 철학은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들의 집합"이라고 가정해왔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서양 학문 전체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에요.
화이트헤드는 그 전제를 정면으로 뒤집었어요.
5년 전 사진 속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물'이 아니에요.
같은 흐름을 잇는 서로 다른 사건이에요.
그게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세계예요.
과학의 시대에 형이상학을 부활시킨 셈이에요.
형이상학이란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 근본 구조를 묻는 학문이에요.
하지만 옛 형이상학이 가정한 '고정된 사물'은 전부 해체했어요.
그리고 그 철학을 만든 사람은 자신의 기록을 전부 태우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어요.
모든 것은 흘러가고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고 했던 사람이, 자신 역시 기록이 아닌 흐름으로만 남고 싶었던 걸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2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