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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천 년 동안 유럽 대학을 둘로 쪼갠 논쟁은, 한 철학자가 "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한 문단에서 시작됐어요.
기원후 3세기경, 포르피리오스라는 철학자가 이사고게(Isagoge)라는 얇은 책을 썼어요.
이사고게는 그리스어로 '입문'이라는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을 위한 짧은 안내서예요.
그 책 서문에 세 가지 질문이 있어요.
"보편자, 즉 인간이나 동물처럼 여러 개체를 하나로 묶는 일반 개념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머릿속에만 있는가? 물질인가, 비물질인가? 사물 속에 있는가, 사물 밖에 있는가?"
보편자가 어떤 개념인지 잘 모르겠다면 고양이를 떠올려봐요.
눈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어요. 그건 구체적인 개체예요.
그런데 '고양이'라는 개념 자체는 어디 있나요?
내 머릿속에만 있는 건가요, 아니면 이 우주 어딘가에 진짜로 존재하는 건가요?
포르피리오스는 이 세 질문을 던지고 나서 바로 이렇게 적었어요.
"이 문제는 입문서에서 다루기엔 너무 깊다."
그리고는 다음 챕터로 넘어가버렸어요.
시험지에 문제를 써놓고 "이 문제는 여기선 풀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은 셈이에요.
하지만 그 빈칸은 천 년 동안 채워지지 않았고,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와 윌리엄 오컴이라는 중세 철학자들이 그 빈칸을 두고 격돌하게 됐어요.
포르피리오스가 죽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스승이 그를 시칠리아로 떠나보냈기 때문이에요.
포르피리오스의 본명은 말코스예요.
아람어로 '왕'이라는 뜻이에요.
로마에서 활동하던 철학자 플로티노스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이름을 바꿨어요.
플로티노스는 신플라톤주의를 창시한 3세기 로마의 철학자예요.
신플라톤주의는 쉽게 말하면 "이 세계는 완전한 존재인 '일자'에서 흘러넘쳐 나온 그림자"라는 사상이에요.
당시 지식인 세계에서 스타급 인물이었어요.
포르피리오스는 스승 이름에서 '자줏빛'을 뜻하는 그리스어를 골라 새 이름으로 삼았어요.
로마에서 5년간 스승 곁에 머물렀는데, 어느 날 극심한 우울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어요.
플로티노스가 그걸 먼저 알아챘어요.
그는 포르피리오스를 시칠리아로 보내 요양하게 했어요.
그런데 그 사이, 스승이 세상을 떠났어요.
포르피리오스는 시칠리아에서 돌아와 스승의 강의 노트와 원고를 들여다봤어요.
30년 가까이 다듬고 정리해서 엔네아데스(Enneades)라는 전집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았어요.
엔네아데스는 '아홉씩 묶인 책'이라는 뜻으로, 플로티노스 사상 전체를 집대성한 전집이에요.
자기 책이 아닌 스승의 책에 평생을 바친 셈이에요.

포르피리오스의 책 15권은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를 반박하려던 사람들이 옮겨 적은 문장만 남아 있을 뿐이에요.
포르피리오스는 《기독교인 반박(Adversus Christianos)》이라는 책을 썼어요.
복음서의 모순을 지적하고, 다니엘서 예언의 연대가 틀렸다고 주장한 15권짜리 대작이었어요.
그 비판이 너무 정확하고 날카로워서 기독교 쪽은 정면으로 답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결국 200년 뒤인 448년,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칙령을 내렸어요.
"이 책의 모든 사본을 불태우라."
사본은 전부 사라졌어요.
하지만 포르피리오스를 반박하려던 기독교 신학자들이 논거를 세우면서 그의 문장을 인용해뒀어요.
덕분에 약 100개의 단편이 살아남았어요.
비판서를 불태웠는데, 그를 무너뜨리려던 책들 속에 원문이 살아남은 거예요.
소각을 명령한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그 책을 보존한 셈이에요.
기독교는 포르피리오스의 책 15권을 불태웠지만, 그의 다른 책 한 권은 천 년 동안 자신들의 교과서로 삼았어요.
6세기 로마의 철학자 보에티우스가 이사고게를 라틴어로 번역했어요.
그러자 이 얇은 입문서는 중세 유럽 모든 대학의 1학년 필수 교재가 됐어요.
오늘날로 치면 전국 모든 대학교 교양 첫 수업에서 같은 교재를 쓰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포르피리오스가 끝내 답하지 않은 세 질문이 드디어 폭발했어요.
"보편자는 실재한다"고 주장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재론과, "보편자는 이름일 뿐이다"라고 주장한 윌리엄 오컴의 유명론이 충돌한 거예요.
실재론은 '고양이'라는 개념이 우주 어딘가에 진짜 존재한다는 입장이고, 유명론은 그건 우리가 편의상 붙인 딱지일 뿐이라는 입장이에요.
이 충돌이 보편자 논쟁이에요.
중세 신학과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쟁점이 됐고, 중세 유럽 지식 체계의 지형을 바꿔놓았어요.
그 논쟁의 씨앗은 한 이교도 철학자가 써놓고 답하기를 거부한 다섯 문장이에요.
자기 책이 불태워진 이교도가, 자신을 불태운 종교의 지식 체계를 설계한 셈이에요.
그 아이러니를, 포르피리오스 본인은 알 수 있었을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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