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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선생님도 없고, 글자가 적힌 책 한 권도 없고, 말을 걸어 줄 사람도 한 명 없는 외딴섬에 갓난아기가 홀로 남겨졌다고 상상해 볼까요. 이 아이가 다행히 무사히 자란다고 쳐요. 그렇다면 이 아이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더 나아가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지까지 오직 자기 머리 하나로 알아낼 수 있을까요? 얼핏 들으면 말도 안 되는 공상 같지요.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850년 전에, 바로 이 질문을 진지하게 파고들어 한 편의 이야기로 써낸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의 이름이 이븐 투파일이에요. 오늘은 이 사람과, 그가 남긴 한 권의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 볼게요.

이븐 투파일은 1105년 무렵에 태어나 1185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에요. 지금의 스페인 남부, 그 시절에는 이슬람 사람들이 다스려서 안달루스라고 부르던 땅에서 살았지요. 그는 한 가지 일만 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의사였고, 나라를 다스리는 왕 곁에서 조언하는 신하였고, 동시에 세상의 이치를 깊이 따져 보기를 좋아하는 철학자였어요. 훗날 유럽에까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철학자 이븐 루시드를 왕에게 소개해 준 사람도 바로 그였고요. 그런데 이렇게 바빴던 그의 이름을 800년 넘게 살아남게 한 건, 놀랍게도 단 한 권의 얇은 이야기책이에요. 제목은 하이 이븐 야크잔. 우리말로 풀면 '깨어 있는 이의 아들, 살아 있는 자'쯤 되는 뜻이에요.

이야기의 주인공은 하이라는 아이예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섬에서 어미 사슴의 젖을 먹고 자라요.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길러 준 사슴이 죽고 말아요. 하이는 깊은 슬픔에 빠지지만, 동시에 이상한 궁금증이 생겨요. 조금 전까지 따뜻하게 움직이던 몸이 왜 갑자기 차갑게 멈췄을까? 그는 사슴의 몸을 조심스레 직접 들여다봐요. 그러다 가슴속에서, 몸을 움직이고 따뜻하게 데우던 '무언가'가 빠져나갔다는 걸 어렴풋이 알아차려요. 누가 알려 준 게 아니라, 보고 만지고 따져 보면서 스스로 깨달은 거예요.
여기서부터 하이의 탐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돼요. 불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그 따뜻함이 사슴의 몸속 온기와 닮았다는 걸 떠올려요. 풀과 나무와 동물을 서로 견주어 보고, 밤이면 별이 도는 하늘을 올려다보고요. 이븐 투파일은 하이가 자라는 과정을 대략 일곱 살 단위로 나누어 보여 줘요. 우리가 한 학년씩 올라가며 배우는 게 깊어지듯, 하이도 나이를 먹을수록 더 큰 질문으로 나아가요. 그렇게 여러 단계를 거친 끝에, 마침내 이 모든 것을 있게 한 어떤 큰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까지 혼자 힘으로 가닿아요.

사실 이 이야기의 진짜 핵심은 뒷부분에 숨어 있어요. 어느 날, 이웃 섬에서 압살이라는 사람이 하이가 사는 섬으로 건너와요. 압살은 여러 사람과 어울려 살던 곳에서, 종교의 가르침을 통해 진리를 배운 사람이에요. 경전을 읽고, 하늘이 내려 준 말씀인 계시를 받아들이면서 배운 거죠. 쉽게 말해 하이가 스스로 깨친 학생이라면, 압살은 좋은 책과 선생님에게서 배운 학생인 셈이에요.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져요. 평생 혼자만의 생각으로 진리에 다다른 하이와, 종교의 가르침을 통해 같은 진리를 배운 압살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눠 보니, 둘이 끝내 도착한 곳이 똑같았던 거예요. 한 사람은 스스로 따지는 '이성'이라는 길로, 다른 사람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계시'라는 길로 걸어왔는데, 두 길의 끝이 한자리에서 만난 셈이죠. 이게 바로 이븐 투파일이 가장 말하고 싶었던 '이성과 계시의 조화'예요. 스스로 생각해서 얻은 답과 믿음으로 건네받은 답이, 서로 다투기는커녕 똑같은 진리를 나란히 가리킨다는 이야기예요.

이븐 투파일이 살던 시절, 똑똑한 사람들 사이에는 꽤 큰 다툼이 있었어요. 머리로 따지는 철학과 믿음으로 받드는 종교가 서로 어긋나는 것 아니냐는 논쟁이었죠. 한쪽을 손에 쥐면 다른 쪽은 내려놓아야 할 것만 같았어요. 이븐 투파일은 무인도 아이 이야기를 빌려 조용히 대답해요. 둘은 서로 싸우는 사이가 아니라, 같은 산봉우리를 서로 다른 등산로로 오르는 두 사람과 같다고요. 길이 다를 뿐, 꼭대기에서는 결국 만난다는 거죠.
이 얇은 책은 세월이 흘러 1671년에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유럽 곳곳에서 읽혔어요. 그때 붙은 제목이 '스스로 배운 철학자'였죠. 사람이 남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어디까지 알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은, 그 뒤로도 여러 사상가의 마음을 오래 붙들었어요.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사람의 이야기로 유명한 훗날의 소설들과도 먼 친척뻘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예요.

이븐 투파일은 무인도에서 혼자 자란 하이라는 아이를 통해, 사람이 누구에게 배우지 않고도 보고 생각하는 힘만으로 깊은 진리에 닿을 수 있다는 걸 그렸어요. 그리고 그렇게 이성으로 얻은 답이, 종교가 계시로 전하는 답과 다투지 않고 같은 자리에서 만난다고 보았고요. 이성과 계시는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같은 진리로 향하는 두 갈래 길이라는 것. 850년 전 한 철학자가 무인도 이야기에 살며시 담아 둔 이 생각은, 믿음과 생각이 꼭 부딪쳐야 하느냐고 우리가 묻는 오늘에도 잔잔한 답을 건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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