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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높은 산 하나를 떠올려 볼까요. 동쪽 완만한 흙길로 천천히 오르는 사람도 있고, 서쪽 가파른 바위를 손으로 짚으며 오르는 사람도 있어요. 걷는 길은 서로 많이 달라 보이지만, 결국 모두 같은 봉우리를 향해 가고 있죠. 그런데 동쪽 길로 오른 사람이 "내가 걸은 길만 진짜 산길이고, 네 길은 가짜야"라고 우긴다면 좀 이상하지 않나요. 두 사람이 만나는 곳은 어차피 똑같은 정상인데 말이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우리 것만 옳다"며 다투는 모습을 보면서, 한 한국 사상가는 바로 이 산 그림을 떠올렸어요. 그 사람이 함석헌이에요. 오늘은 그가 종교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천천히 따라가 볼게요.

함석헌은 1901년부터 1989년까지, 88년을 산 한국의 사상가예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 그리고 30년 가까이 이어진 군사 독재까지 한국 현대사의 거친 시기를 온몸으로 통과한 분이죠. 그는 평생 한 가지 말을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 바로 "씨알"이에요. 씨알은 씨앗을 뜻하는 옛말로, 이름 없이 묵묵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가리켜요. 땅에 묻힌 작은 씨앗 하나가 시간이 지나면 큰 나무가 되듯, 역사를 진짜로 밀고 가는 힘은 높은 자리의 권력자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속에 있다고 본 거예요. 이 생각은 그의 스승이었던 유영모에게서 물려받아 자기 것으로 키운 것이기도 해요. 그래서 함석헌은 폭력 대신 말과 글, 그리고 끝까지 버티는 힘으로 잘못된 권력에 맞섰어요. 인도에서 비폭력으로 영국에 맞선 간디가 걸었던 길과 닮았죠.

함석헌은 원래 기독교, 그중에서도 퀘이커라는 조용한 교파를 따랐어요. 떠들썩한 의식보다 마음속 고요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는 성경만 읽은 게 아니에요. 노자와 장자 같은 동양 고전, 불교와 유교까지 두루 깊이 읽었어요. 그러면서 한 가지를 느꼈죠. 표현하는 말과 방식은 종교마다 다르지만, 그 안에서 가리키는 마음은 놀랍도록 닮았다는 거예요. 서로 사랑하라, 욕심을 내려놓아라, 작은 생명 하나도 귀하게 여겨라. 마치 같은 노래를 한국어와 영어와 한문으로 부르는 것 같았어요. 가락은 같은데 가사만 다른 셈이죠. 그래서 그는 "어느 한 종교가 진리를 통째로 독차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여러 종교를 똑같이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를 어려운 말로 종교 다원주의라고 불러요.

그럼 종교가 여러 개니까 그냥 따로따로 두면 되는 걸까요. 함석헌은 한 걸음 더 나아갔어요. 서로 다른 가르침이 만나서 통하고 어우러질 수 있다고 본 거예요. 이걸 회통이라고 해요. 돌아올 회에 통할 통, 돌아와 서로 통한다는 뜻이죠. 멀리 떨어진 산골짜기에서 따로따로 흐르던 작은 물줄기들이 아래로 내려와 한 강에서 만나는 모습을 떠올리면 쉬워요. 출발한 자리도 다르고 흘러온 길도 달랐지만, 바다 앞에서는 결국 한 물이 되죠. 함석헌에게 기독교와 불교와 노장 사상은 서로 싸워 이겨야 할 적이 아니라, 같은 진리를 다른 자리에서 비춘 여러 개의 거울 같은 것이었어요. 거울이 놓인 방향이 다르니 비치는 모습도 조금씩 다를 뿐이죠. 그래서 그는 자기가 선 기독교 자리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다른 종교의 말을 함께 품을 수 있었어요.

여기서 한 가지 걱정이 들 수 있어요. 다른 종교를 그렇게 가까이하면 자기 믿음이 흐물흐물 약해지는 건 아닐까 하고요. 함석헌의 답은 반대였어요. 외국어를 하나 더 배운다고 모국어를 잊는 게 아니듯, 다른 종교를 깊이 들여다볼수록 자기 믿음의 뿌리가 무엇인지 오히려 또렷해진다고 봤죠. 그는 불교 경전을 읽으며 성경의 한 구절을 더 깊이 이해하고, 노자를 읽으며 예수의 말을 새롭게 곱씹었어요. 서로 다른 거울이 여러 각도에서 같은 얼굴을 비춰 주니, 내가 누구인지 더 잘 보이는 셈이에요. 회통은 자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자기를 더 넓은 자리에서 다시 보는 일이었던 거죠.

이 생각이 그저 멋진 말장난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다투는 일이, 함석헌의 시대에도 지금도 좀처럼 끊이지 않으니까요. 회통은 "네 믿음을 버리고 내 믿음으로 건너와"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가리키는 곳이 사실 같을지도 모른다"며 먼저 귀를 여는 태도에 더 가까워요. 이건 그의 씨알 사상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져요. 보통 사람 한 명 한 명이 소중하듯, 그 사람이 가슴에 품은 믿음도 함부로 짓밟을 수 없다는 거죠. 함석헌은 이 생각을 책상 위에만 두지 않았어요.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를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고, 평생 행동으로 보여 줬죠. 그 삶이 인정받아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어요.

함석헌은 종교를 산을 오르는 여러 갈래 길로 봤어요. 길은 달라도 봉우리는 하나일 수 있다는 것, 그게 종교 다원주의예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 다른 가르침이 한 강에서 만나듯 통할 수 있다고 본 것이 회통이고요. 다른 종교를 아는 일은 내 믿음을 지우는 게 아니라 더 또렷하게 보는 일이었죠. 이 모든 생각의 뿌리에는 이름 없는 보통 사람, 곧 씨알을 귀하게 여긴 따뜻한 마음이 있었어요. 다음에 나와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누가 옳은지 먼저 따지기보다 "우리가 보고 있는 봉우리가 혹시 같을까" 하고 한 번 물어보는 것, 그게 함석헌이 우리에게 남긴 작은 숙제일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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