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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상상해 볼까요. 우리 반 교과서가 100년 전 어른들이 쓰던 어려운 옛말로만 적혀 있어서, 아무리 똑똑한 친구라도 따로 몇 년을 배워야 겨우 한 줄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 글을 읽고 쓰는 일이 몇몇 사람만의 특권이 되겠죠. 그리고 그 몇몇 사람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책으로 나누고, 나머지는 늘 전해 듣기만 했을 거예요.
100년 전 중국이 딱 그랬어요. 책과 신문은 '문언문'이라는 옛 문어체로 쓰였는데, 평소 입으로 하는 말투와 너무 달라서 학교를 오래 다닌 사람만 읽을 수 있었어요. 백성 대부분은 글자를 봐도 무슨 뜻인지 몰랐죠. 게다가 '옛것이 곧 올바른 것'이라는 생각이 워낙 단단해서, 이 틀을 의심하는 사람조차 드물었어요. 이 답답한 벽을 깨려 한 사람이 바로 후스예요.

후스는 1891년부터 1962년까지 살았던 중국의 철학자예요. 젊을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컬럼비아 대학에서 존 듀이라는 유명한 철학자에게 배웠어요. 1917년, 스물여섯 살쯤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중국 사회를 통째로 흔드는 큰 흐름의 한가운데에 서게 됩니다.
그 흐름이 바로 '신문화운동'이에요. 이름 그대로 낡은 문화를 새 문화로 바꾸자는 운동인데, 1915년에 창간된 잡지 '신청년'을 중심으로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 일으켰어요. 후스는 그 잡지에 글을 실으며 운동의 대표 얼굴 중 한 명이 됩니다.

후스가 가장 먼저 내건 주장은 단순했어요. "말하듯이 글을 쓰자." 평소 입으로 하는 말 그대로 글을 쓰자는 거예요. 이렇게 쓴 글을 '백화문'이라고 불러요.
생각해 보면 당연한 말 같지만, 그때는 엄청난 도전이었어요. 수천 년 동안 '제대로 된 글'은 반드시 어려운 옛 문어체로 써야 한다고 믿었거든요. 평소엔 "밥 먹었니"라고 말하면서, 글로 쓸 땐 전혀 다른 옛말을 따로 익혀야 했던 셈이죠. 우리로 치면, 친구랑은 지금 말로 떠들면서 일기는 꼭 옛 한문 투로 써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 것과 비슷해요. 후스는 1917년 신청년에 글을 발표해, 이제 살아 있는 우리 말로 문학을 하자고 외쳤어요.
이게 왜 중요할까요. 글이 쉬워지면 훨씬 많은 사람이 읽고 쓸 수 있으니까요. 지식이 몇몇 학자의 손에서 풀려나 보통 사람에게로 퍼지는 거예요. 자물쇠가 채워져 있던 도서관 문을 활짝 연 것과 같았죠. 실제로 이 주장은 빠르게 힘을 얻어서, 1920년 무렵엔 초등학교 교과서까지 백화문으로 바뀌기 시작했어요.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있어요. 후스가 '공자를 비판했다'고 하면 공자를 나쁜 사람이라고 욕한 걸로 들리지만, 그렇지 않아요.
후스가 겨눈 건 공자 개인이 아니라, 오랜 세월 굳어 버린 '공자라는 간판을 건 낡은 규칙들'이었어요. 그 무렵 사람들은 '예전부터 그래 왔으니 무조건 따라야 한다'며 개인을 억눌렀어요. 부모가 정해 준 사람과 얼굴도 못 보고 결혼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배움을 막고, 윗사람 말이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못하게 했죠. 그 무렵 젊은이들 사이에는 "공자 가게를 때려부수자"는 구호까지 돌았는데, 후스도 이 흐름의 한가운데 있었어요.
비유하자면 공자라는 사람을 미워한 게 아니라, 그 이름을 내건 가게에 수백 년 묵은 먼지 낀 물건이 잔뜩 쌓여 있어서 그걸 치우자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는 공자의 가르침을 통째로 버리자고 한 게 아니라, 사람을 옭아매는 굳은 껍데기를 깨고 한 명 한 명을 자유로운 사람으로 대하자고 한 거죠. 실제로 후스는 옛 사상 속에서도 쓸모 있는 알맹이는 따로 골라내려 애썼답니다.

그럼 낡은 규칙 대신 무엇을 따라야 할까요. 후스의 답은 '실험주의'였어요. 미국에서 배운 듀이의 생각을 가져온 건데, 말은 어려워도 핵심은 과학자의 태도예요.
후스는 이걸 짧은 말로 정리했어요. "대담하게 가정하고, 조심스럽게 증명하라." 어떤 주장이든 "옛 어른이 그랬으니까"가 아니라, 증거를 찾아보고 따져 본 뒤에 믿자는 거예요. 과학 시간에 직접 실험해 결과를 확인하는 것처럼요. 실제로 그의 스승 듀이는 1919년부터 2년 넘게 중국에 머물며 이 생각을 곳곳에 전했어요.
그래서 후스는 옛 책과 전통도 무조건 내버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하나하나 꺼내서 "이게 정말 맞는 말인지" 차근차근 따져 보자고 했죠. 믿음이 아니라 확인, 이게 그가 평생 지킨 태도였어요.

후스의 주장들은 결국 한 곳을 향했어요. 바로 '스스로 생각하는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쉬운 글로 누구나 지식에 다가가고, 낡은 규칙을 의심하고, 증거로 따지는 태도. 이건 한 사람 한 사람을 어엿한 어른으로 대하는 일이었어요.
1919년 오사운동을 거치며 이런 생각은 중국 젊은이들에게 크게 번졌고, 후스는 중국에 자유주의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기억돼요. 물론 모두가 그에게 동의한 건 아니에요. 더 급하게 갈아엎자는 사람도, 전통을 지키자는 사람도 있었죠. 그래도 '쉬운 글과 자유로운 생각'이라는 그의 두 화두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요.

후스는 어려운 옛 문어체 대신 말하듯 쓰는 백화문을 퍼뜨려, 글을 몇몇 사람의 특권에서 모두의 것으로 바꾸려 했어요. 그가 비판한 건 공자 개인이 아니라 사람을 옭아매던 낡은 규칙이었고, 그 자리에 "의심하고 증거로 확인하라"는 과학자의 태도를 놓으려 했죠. 글은 쉽게, 생각은 자유롭게. 이 두 가지가 후스가 신문화운동으로 바꾸려 한 것이고, 그래서 그는 지금도 중국 현대 사상의 문을 연 사람으로 불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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