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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외딴 섬을 하나 떠올려 볼게요. 사람이라곤 아무도 살지 않고, 갓난아기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요. 엄마도 아빠도, 말을 가르쳐 줄 어른도 없어요. 그런데 마침 새끼를 잃은 암사슴 한 마리가 이 아기를 거두어 젖을 먹여 키워요. 아기는 사슴을 따라다니며 자라고, 추우면 몸을 맞대고, 배고프면 열매를 따 먹어요.
이 아기 이름이 하이예요. 그리고 하이는 자라면서 놀라운 일을 해내요.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불을 다루고, 죽은 동물의 몸속을 들여다보고, 밤하늘의 별을 세다가, 끝내 "이 세상은 도대체 누가, 왜 만들었을까"라는 질문까지 혼자 떠올려요.
이건 그냥 모험 동화가 아니에요. 약 900년 전, 한 철학자가 아주 진지한 질문을 던지려고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예요. 사람이 책도 스승도 없이, 오직 제 머리 하나로 진리에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요.

이 이야기를 쓴 사람은 이븐 투파일이에요. 1105년 무렵, 지금의 스페인 남부에서 태어났어요. 그때 그 땅은 이슬람 문명이 활짝 피어 있던 곳이라, 의학과 수학과 철학이 한데 모여 있었어요. 이븐 투파일은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의사이자 철학자였고, 그 지역 군주의 주치의 겸 자문 역할까지 맡았던 이름난 지식인이었어요.
그가 살던 시절엔 큰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어요. 머리로 따지는 철학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종교가 서로 으르렁대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한쪽은 논리로 따져야 진짜라 했고, 다른 쪽은 믿음만이 길이라 했죠. 이븐 투파일은 이 둘이 사실 같은 산을 오르는 두 갈래 길이라고 봤어요. 그 생각을, 어려운 논문 대신 무인도 소년 이야기로 풀어 보여 준 거예요. 책 제목이 바로 '하이 이븐 야크잔', 우리말로 옮기면 '깨어 있는 이의 아들, 살아 있는 자' 정도예요.

하이가 진리에 닿는 과정은 단숨이 아니라 차근차근이에요. 이야기 속에서 하이는 일곱 살쯤마다 한 단계씩 올라가요.
처음엔 다른 동물과 다를 게 없어요. 먹고, 자고, 추위를 피하죠. 그러다 자기를 키워 준 사슴이 죽자, 하이는 어제까지 움직이던 몸이 왜 갑자기 멈췄는지 궁금해서 그 몸을 직접 갈라 봐요. 심장을 찾아보며 '생명을 움직이는 무언가'를 떠올리는 거예요. 누가 알려 준 게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스스로 알아낸 거죠.
여기서부터 하이는 한 걸음씩 넓혀 가요. 풀과 나무와 동물이 저마다 다르지만 어딘가 닮았다는 걸 보고, 이 많은 것들 뒤에 하나로 꿰는 질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마치 처음 보는 기계를 뜯어보다가 "이걸 만든 누군가가 있겠구나" 하고 깨닫는 것처럼요.

관찰을 거듭하던 하이는 마침내 큰 결론에 이르러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생겨났다 사라지는데, 그 모두를 있게 한 '스스로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우리가 흔히 신이라 부르는 그 자리죠. 하이는 경전 한 줄 읽은 적 없이, 오직 자연을 관찰하고 따져서 거기까지 간 거예요.
이븐 투파일이 하고 싶었던 말이 여기 있어요. 진리는 특별한 책이나 정해진 말로만 닿는 게 아니라, 멀쩡한 머리와 정직한 관찰만 있으면 누구나 다가갈 수 있다는 거죠. 무인도라는 텅 빈 무대를 고른 이유도 그거예요. 사회도 언어도 종교도 다 걷어 낸 자리에서 사람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보고 싶었던 거예요.

하이가 어른이 됐을 무렵, 옆 섬에서 한 사람이 건너와요. 아살이라는 사람이에요. 그는 조용히 신을 섬기려고 일부러 사람 없는 섬을 찾아온 신앙인이었어요. 둘은 처음엔 말이 안 통했지만, 아살이 하이에게 말을 가르치면서 대화를 나누게 돼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아살이 경전과 신앙으로 배운 진리와, 하이가 혼자 관찰로 깨친 진리가 거의 같았던 거예요. 길은 달랐는데 도착한 곳이 같았던 거죠. 다만 아살의 고향 사람들에게 하이의 깊은 깨달음을 그대로 전하려 하자,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했어요. 그래서 하이는 깨닫죠. 대다수 사람에겐 종교가 들려주는 쉬운 이야기와 규칙이 오히려 필요하다는 걸요. 머리로 끝까지 따지는 길은 아무나 걷는 게 아니니까요.

이 이야기는 800년이 훌쩍 넘도록 살아남았어요. 1600년대엔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서도 널리 읽혔고, 스스로 깨치는 인간이라는 그림은 뒷날 여러 사상가에게 영감을 줬어요.
오래 사랑받은 이유는 단순해요. 누구나 한 번쯤 "내가 아는 게 진짜 내 생각일까, 아니면 그냥 주워들은 걸까" 궁금해하잖아요. 하이는 아무것도 주워듣지 못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하이가 무언가를 깨칠 때마다, 그건 오롯이 사람 머리가 해낼 수 있는 일의 증거가 돼요. 무인도는 사실 우리 각자의 마음속, 남의 말을 다 걷어 낸 자리이기도 하고요.

이븐 투파일의 이야기는 무인도에 홀로 자란 하이가 책도 스승도 없이 오직 관찰과 생각만으로 세상의 큰 질서까지 더듬어 가는 과정을 그려요. 그리고 그렇게 혼자 닿은 진리가, 신앙으로 배운 진리와 같은 곳에서 만난다는 걸 보여 주죠. 다만 그 길을 끝까지 혼자 걷는 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는 솔직하게 덧붙여요. 그러니 이 글에서 하나만 챙긴다면 이거예요. 진리에 닿는 길은 하나가 아니고, 우리 머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멀리 갈 수 있다는 것.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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