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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시험지를 돌려받았는데 빨간 빗금이 잔뜩 그어져 있어요. 어디서 틀렸는지 보기 싫어서 그냥 가방에 쑤셔 넣어 버린 적, 있지 않나요? 다음 시험에서 또 같은 데서 틀리는데도요.
함석헌이라는 사람은, 한 나라 전체가 시험지가 아니라 훨씬 큰일을 그렇게 넘기는 걸 보고 답답해했어요. 큰 전쟁을 겪고도 왜 이런 일이 우리한테 닥쳤는지 아무도 곰곰이 따져 보지 않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짧지만 따끔한 한마디를 던집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함석헌은 1901년부터 1989년까지, 그러니까 여든여덟 해를 산 한국의 사상가예요. 사상가라는 말이 어렵게 들리면, 세상이 왜 이렇게 굴러가는지 평생 묻고 또 묻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는 높은 자리에 앉은 적이 없어요. 대통령도 장군도 아니었죠. 대신 글을 쓰고 강연을 하면서, 힘없는 보통 사람들 편에 서서 잘못된 권력에는 또박또박 아니라고 말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여러 번 끌려가 조사를 받고 감옥에도 갇혔어요.

이 말은 1958년, 함석헌이 사상계라는 잡지에 쓴 글의 제목이에요. 한국전쟁이 끝나고 겨우 다섯 해쯤 지난 때였죠.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된 직후예요.
보통은 그럴 때 누구 탓을 하거나, 빨리 잊고 싶어 해요. 그런데 함석헌은 다른 걸 물었어요. 우리는 왜 이 전쟁을 남의 일처럼 겪었을까. 왜 남이 시키는 대로 끌려다니기만 했을까.
그의 답이 바로 제목이에요.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백성은, 누가 와서 흔들면 흔들리는 대로 휘둘리다 결국 무너진다. 반대로 스스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비로소 제 발로 서서 산다. 백성이라는 건 어려운 말이 아니라, 그냥 나와 당신 같은 보통 사람들을 가리켜요.

함석헌의 생각을 한 단어로 묶으면 씨알이에요. 씨알은 곡식의 낟알, 곧 씨앗을 뜻하는 우리말이에요.
왜 사람을 씨앗에 빗댔을까요. 씨앗은 작고 볼품없어요. 흙 속에 묻혀 눈에도 잘 안 띄죠. 하지만 그 작은 씨앗 하나하나가 싹을 틔워야 들판이 푸르러져요. 씨앗 없는 봄은 없으니까요.
함석헌은 나라도 똑같다고 봤어요. 잘난 영웅 몇 명이 아니라, 이름 없는 보통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스스로 생각하고 깨어 있을 때 나라가 산다는 거예요. 그러니 너 자신이 바로 씨앗이라고, 그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말한 셈이에요.

그럼 잘못된 힘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함석헌은 주먹이나 총이 아니라 비폭력으로 맞서야 한다고 했어요.
비폭력은 가만히 참는 것과는 달라요. 친구가 새치기를 했다고 똑같이 밀치는 대신, 줄을 서서 또박또박 그건 옳지 않다고 말하는 쪽에 가까워요. 폭력을 폭력으로 갚으면 더 센 폭력만 남지만, 옳음을 굽히지 않고 버티면 결국 잘못한 쪽이 부끄러워진다는 믿음이죠. 인도에서 간디가 보여 준 길이기도 한데, 함석헌은 그 정신을 한국 땅에서 자기 식으로 풀어냈어요.

함석헌은 사람을 작은 씨앗에 빗댄 사상가예요. 그가 남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말은, 큰일을 겪고도 왜냐고 묻지 않으면 또 같은 일에 휘둘린다는 따끔한 충고예요. 틀린 시험지를 다시 펴 보는 마음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것, 그리고 잘못된 힘에는 주먹 대신 굽히지 않는 옳음으로 맞서는 것. 이 두 가지가 그가 평생 붙든 답이에요. 그래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말은, 60년도 더 지난 지금 나와 당신에게도 똑같이 건네는 물음으로 남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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