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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아토마는 그리스어로 '자를 수 없는 것'입니다. 데모크리토스는 물질을 계속 쪼개다 보면 더는 쪼갤 수 없는 단단한 알갱이에 이른다고 보았고, 실제로 있는 것은 그 알갱이들뿐이며 우리가 보는 색과 맛은 알갱이들이 어떻게 모였느냐에 따라 생기는 결과라고 설명했습니다.
종이 한 장을 반으로 접어 자르고, 또 자르고, 계속 자른다고 해 볼까요.
손이 아니라 상상 속의 아주 작은 가위로 무한히 자를 수 있을까요?
데모크리토스는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언젠가는 가위가 들어가지 않는 지점, 더는 잘리지 않는 알갱이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 알갱이의 이름이 아토마(ἄτομα)예요.
'a(아니다)'와 'tomos(자름)'를 붙인 말이라, 뜻이 그대로 '자를 수 없는 것'입니다.
기원전 460년쯤 트라키아의 아브데라에서 태어난 데모크리토스는 스승 레우키포스가 시작한 이 생각을 촘촘하게 다듬었습니다.
결론은 단순합니다.
세상에 진짜로 있는 것은 아토마와 그것이 움직일 빈 곳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이 알갱이들이 모이고 흩어진 결과라는 것이죠.
왜 더 못 자를까요?
아토마 안에는 틈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부수려면 그 안에 파고들 빈틈이 있어야 하는데, 아토마는 속까지 꽉 찬 통짜라 칼날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알갱이는 새로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개수는 무한하고, 빈 공간 속에서 영원히 움직입니다.
데모크리토스보다 앞서 파르메니데스라는 철학자가 아주 곤란한 주장을 던져 놓았습니다.
'있는 것'은 하나이고 변하지 않으며, 우리가 보는 변화와 여럿은 착각이라는 겁니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나올 수는 없으니까요.
논리는 빈틈이 없는데, 눈앞에서 얼음은 녹고 나무는 자랍니다.
원자론은 이 물음에 답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변화란 없던 것이 갑자기 생기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있던 아토마들이 자리를 바꿔 다시 모이는 일이라는 겁니다.
레고 블록을 떠올리면 쉽습니다.
자동차를 부수고 집을 만들어도 블록 자체는 하나도 새로 생기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모양만 바뀌죠.
나무가 타서 재가 되는 것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파르메니데스의 규칙을 지키면서도 변화를 살려낸 셈입니다.
알갱이가 다 똑같다면 세상이 이렇게 다양할 리 없겠죠.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한 바에 따르면 아토마는 딱 세 가지 방식으로만 서로 다릅니다.
알파벳 글자로 설명한 비유가 유명합니다.
| 차이 | 그리스어 | 글자 비유 |
|---|---|---|
| 모양 | 스케마 | 'A'와 'N'은 생김새가 다르다 |
| 배열 | 탁시스 | 'AN'과 'NA'는 순서가 다르다 |
| 방향 | 테시스 | 'N'과 옆으로 누운 'Z'는 놓인 방향이 다르다 |
모양은 무한히 다양합니다.
공처럼 둥근 것, 모가 난 것, 갈고리가 달린 것이 있고 크기도 저마다 다릅니다.
이 세 가지 차이만으로 흙과 물과 불의 차이를 다 설명하려 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글자 스물 몇 개로 책 한 권을 쓰는 것과 같은 발상이에요.
그렇다면 알갱이들은 어떻게 붙어 있을까요?
풀칠을 하는 게 아닙니다.
갈고리 모양 아토마가 서로 걸리고, 튀어나온 돌기가 옴폭한 자리에 끼워집니다.
벨크로 찍찍이나 단추가 구멍에 끼는 장면에 가깝습니다.
순전히 기계적으로 얽혀 있을 뿐이라, 힘을 받으면 다시 풀립니다.
현대 화학의 결합과는 다른 그림이니 겹쳐 읽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여기서 데모크리토스는 한 걸음 더 나갑니다.
남아 있는 단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문장이 이렇습니다.
"관습에 의해 달고, 관습에 의해 쓰고, 관습에 의해 뜨겁고, 관습에 의해 차갑고, 관습에 의해 색이 있다. 그러나 실재로는 아토마와 빈 곳뿐이다."
무슨 말일까요.
단맛이라는 성질이 알갱이 자체에 붙어 있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둥글고 중간 크기의 아토마가 혀에 닿으면 우리는 달다고 느끼고, 작고 얇고 모난 아토마가 닿으면 시다고 느낍니다.
뾰족한 것에 찔리면 아프고 매끈한 것을 쓰다듬으면 부드러운 것과 비슷하죠.
맛은 알갱이와 혀가 만나는 자리에서 생기는 일이지, 알갱이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것을 '아무 맛이나 제멋대로 느껴진다'는 뜻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학자 데이비드 퍼얼리는 여기서 '관습'이 자의성이 아니라 규칙적인 대응을 뜻한다고 보았습니다.
같은 구성의 아토마는 언제나 같은 맛을 일으킨다는 것이죠.
데모크리토스는 앎을 두 갈래로 나눴습니다.
감각으로 얻는 앎은 '서출', 이성으로 얻는 앎은 '적출'이라고 불렀어요.
서자와 적자에 빗댄 옛 표현이라 말이 세게 들리지만, 감각을 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감각이 더는 미세하게 보지도 듣지도 맛보지도 못하는 지점에 이르면, 그때 이성이 더 잘게 구별하는 도구로 들어온다는 겁니다.
눈으로 보다가 한계에 닿으면 현미경을 꺼내는 것과 비슷하죠.
아토마는 너무 작아 눈에 잡히지 않으니 생각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감각과 이성이 서로 이어 달리는 구조라서, 그를 모든 앎을 부정한 회의주의자로 묶기는 어렵습니다.
이름은 같지만 같은 것이 아닙니다.
현대 과학이 말하는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 전자로 더 쪼개집니다.
'자를 수 없는 것'이라는 아토마의 원래 정의와는 어긋나죠.
이름만 물려받은 셈입니다.
주의할 점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흔히 인터넷에 도는 "원자와 빈 공간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나머지는 의견이다"라는 문장은 원문 그대로가 아니라 후대에 의역된 것에 가깝습니다.
아토마에 무게가 본래 있었는지도 지금까지 학자들이 다투는 문제이고, 무게로 하강 운동을 설명한 쪽은 후대의 에피쿠로스입니다.
애초에 데모크리토스의 저작은 한 권도 온전히 남지 않았고, 아리스토텔레스나 심플리키오스 같은 후대 저자들의 인용으로만 조각조각 전해집니다.
세부에서 '이게 정말 본인 생각이었나'라는 물음이 계속 따라붙는 이유입니다.
아토마는 더 쪼갤 수 없는 알갱이입니다.
속이 꽉 차 틈이 없어 부서지지 않고, 생기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며, 모양과 배열과 방향 세 가지로만 서로 다릅니다.
갈고리처럼 서로 얽혀 사물을 이루고, 얽힘이 바뀌는 것이 곧 변화입니다.
달고 쓰고 붉은 것은 이 알갱이들이 우리 감각과 만나 생기는 일이고, 실재로 있는 것은 알갱이와 그것이 움직일 빈 곳뿐입니다.
눈이 닿지 않는 곳부터는 생각이 이어받아 따라가야 한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실험 도구 하나 없던 시절, 종이를 계속 자르면 어디에 닿을까라는 물음 하나로 여기까지 밀고 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오래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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