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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프란츠 파농이 말한 인종화된 신체 경험은, 남의 시선이 내 몸을 내가 사는 몸이 아니라 피부색으로 먼저 읽히는 대상으로 바꿔 놓는 일을 가리켜요. 파농은 1952년 책 《검은 피부, 하얀 가면》 5장에서 이 상태를 인종적 표피도식이라고 불렀어요.
《검은 피부, 하얀 가면》 5장은 아주 짧은 외침으로 시작해요.
기차 안에서 백인 아이가 파농을 손가락으로 가리켜요.
파농이 그대로 옮겨 적은 말은 "더러운 검둥이!" 그리고 "봐, 흑인이야!"였어요.
아이는 곧 "무서워!"라고 덧붙여요.
지나가는 일 같지만 파농은 이 순간에 자기 몸이 통째로 달라졌다고 써요.
조금 전까지 그는 그냥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손가락질 하나에 그의 피부가 그 자신보다 먼저 도착해 버려요.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어디로 가는 길인지는 아무 상관이 없어져요.
인종화된 신체 경험이란 이 뒤바뀜을 말해요.
먼저 평소 우리 몸을 생각해 볼게요.
계단을 내려갈 때 발을 몇 센티미터 들어야 하는지 재지 않죠.
문을 지날 때 어깨 너비를 계산하지도 않고요.
뒤에 놓인 컵도 보지 않고 손을 뻗어 잡아요.
몸이 알아서 아는 이 지도를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신체도식이라고 불렀어요.
이 지도의 특징은 조용하다는 거예요.
잘 작동할 때는 있는 줄도 몰라요.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이 페달을 의식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파농은 그 조용한 지도가 무너지는 장면을 이렇게 적어요.
"여러 지점에서 공격받은 신체도식이 무너지고, 그 자리를 인종적 표피도식이 대신했다."
어두운 강당에서 나에게만 조명이 따라붙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걸음마다 내 자세가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이고, 몸은 더 이상 조용한 지도가 아니라 남이 읽어 내리는 표지판이 돼요.
표피는 피부의 가장 바깥층이에요.
사람 전체가 그 얇은 한 겹으로 요약되는 상태, 그게 표피도식이에요.
| 신체도식 | 인종적 표피도식 | |
|---|---|---|
| 몸을 아는 방법 | 내가 움직이며 저절로 | 남의 시선이 먼저 정해줌 |
| 평소 느낌 | 있는 줄도 모름 | 계속 의식됨 |
| 누가 말한 개념인가 | 메를로퐁티 | 파농 |
파농은 여기에 자신이 만든 역사인종적 도식이라는 말을 겹쳐요.
내 몸이 어떤 몸인지를 나 자신이 아니라, 남들이 오래 쌓아 둔 이야기와 이미지가 알려 준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는 소외가 두 겹이라고 봐요.
"먼저 경제적인 것, 그다음 이 열등성의 내면화 즉 표피화."
바깥에서 낮은 자리에 놓이고, 그 낮음이 피부 안쪽까지 들어와 자기를 보는 눈이 되어 버려요.
파농은 1925년 7월 20일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포르드프랑스에서 태어났어요.
제2차 세계대전에 자유프랑스군으로 참전한 뒤 리옹에서 정신의학을 배웠고,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알제리 블리다주앵빌 정신병원의 정신과장으로 일했어요.
부임 1년 뒤인 1954년에 알제리 독립전쟁이 터졌고, 그는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고 가담했다가 1956년 말 프랑스 당국에 쫓겨나 알제리를 떠나요.
1961년 12월 6일, 서른여섯 살에 백혈병으로 미국 메릴랜드주 베데스다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살아 있는 동안 낸 자기 저작은 두 권뿐이에요.
표피도식은 책상 위에서만 나온 말이 아니에요.
진료실과 전쟁 사이에서 나온 말이에요.
첫째, 책이 자주 섞여요.
파농은 흔히 폭력을 말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 논의는 1961년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쪽이고 표피도식은 1952년 《검은 피부, 하얀 가면》 5장이에요.
둘째, 이 5장의 제목은 번역본마다 달라요.
프랑스어 원제는 흑인의 체험된 경험이라는 뜻인데, 마크만의 초기 영어 번역은 흑인성이라는 사실로, 필콕스의 최신 영어 번역은 흑인의 체험된 경험으로 옮겼어요.
앞 번역은 오역에 가깝다는 지적을 받아요.
파농의 논지는 흑인성이 고정된 사실이라는 게 아니라, 흑인성도 백인성도 살아 낸 경험으로 만들어진다는 쪽이니까요.
셋째, 이걸 인종차별을 당하면 마음이 아프다는 정도의 심리 반응으로 줄이면 안 돼요.
파농이 겨눈 건 메를로퐁티식 현상학이 당연하게 여긴 전제, 곧 누구에게나 똑같은 보편적인 몸이라는 생각 자체예요.
사르트르의 응시 이론을 빌려 오면서도, 반유대주의가 상대의 초능력을 무서워하는 마음이라면 반흑인 인종주의는 상대의 약함을 깔보는 마음이라며 구조가 다르다고 구분했어요.
남은 논쟁도 있어요.
5장에는 흑인 여성의 신체 경험이 거의 나오지 않아요.
호미 바바는 1986년판 서문에서 젠더 문제는 자기 서문의 범위를 넘어선다며 다루지 않았고, 앤 매클린톡 등은 그렇게 비켜 가는 것이 여성을 이론 바깥으로 밀어낸다고 비판했어요.
수전 브라운밀러 등은 파농이 백인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방식을 여성혐오적이라고 봐요.
해석의 큰 줄기도 갈려서, 루이스 고든은 실존주의를 파농 사상의 중심으로 읽고 바바는 탈구조주의 쪽에서 그를 포스트식민 이론으로 옮겨 놓아요.
파농이 붙잡은 건 아주 짧은 순간이에요.
기차 안에서 손가락질 한 번에, 조용히 잘 작동하던 몸의 지도가 무너지고 피부 한 겹이 그 자리를 차지해요.
그 뒤로 몸은 내가 사는 곳이 아니라 남이 읽는 표지판이 돼요.
그래서 이 개념은 기분 상하는 일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누구나 똑같은 몸으로 세상을 경험한다는 철학의 전제에, 그 몸이 이미 피부색으로 나뉘어 있다면 어떻게 되느냐고 되묻는 이야기예요.
여기에 흑인 여성의 경험이 빠져 있다는 비판까지 함께 기억해 두면, 파농을 정답이 아니라 아직 이어지는 물음으로 읽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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