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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프란츠 파농은 식민지 사람들이 앓는 마음의 병을 개인의 약함이 아니라 지배 구조가 만든 상처로 봤어요. 그래서 1956년, 알제리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던 그는 사람을 체계적으로 비인간화하는 환경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뜻을 사직서에 적고 병원을 떠났어요.
파농은 1925년 7월 20일 카리브해의 섬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어요.
당시 이 섬은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파농은 프랑스어를 쓰고 프랑스 교육을 받으며 자랐어요.
열여덟 살이던 1943년에는 섬을 떠나 자유프랑스군에 자원해서 입대했고, 1944년 8월 프로방스 상륙작전에 참전했어요.
몽벨리아르 근처 전투에서 포탄 파편에 크게 다쳐 두 달간 입원했고, 크루아 드 게르 훈장도 받았어요.
그런데 전쟁이 끝나갈 무렵, 프랑스군은 흑인 병사들을 부대에서 빼내 툴롱으로 후송하는 정책을 폈고 파농도 그 대상이었어요.
같이 피 흘리며 싸웠는데, 승리의 자리에서는 밀려난 거예요.
이 경험에서 그가 평생 붙들고 간 질문이 시작돼요.
파농은 이후 리옹대학교 의학부에서 공부해 1951년에 의학 학위를 마치고 정신과 의사가 됐어요.
어항에서 물고기가 자꾸 병에 걸린다고 해볼게요.
한 마리를 건져 약을 먹이고 다시 넣고, 또 한 마리를 건져 약을 먹이고 다시 넣어요.
그런데 물이 썩어 있다면요?
아무리 잘 치료해도 물고기는 다시 아파요.
물을 갈지 않는 한 병원은 영원히 바쁘기만 해요.
파농이 본 식민지가 딱 그런 어항이었어요.
매일 무시당하고,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고,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상태로 사는 사람이 불안해하고 잠을 못 자는 건 그 사람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에요.
물이 그런 거예요.
당시 유럽 정신의학에는 비유럽인의 정신이 원래 열등하다고 설명하려는 흐름이 있었는데, 파농은 그 설명을 정면으로 거부했어요.
문제는 사람 안이 아니라 사람이 놓인 자리에 있다고 본 거예요.
파농은 1951년 생 이지에 병원에서 정신의학 수련을 시작해, 1952년부터 1953년까지는 생탈방 정신병원에서 프랑수아 토스켈레스라는 카탈루냐 출신 의사 밑에서 배웠어요.
토스켈레스는 환자를 가둬 두는 대신 병원 자체를 하나의 사회로 만드는 '제도적 정신요법'을 개척한 사람이에요.
파농은 여기서 약 15개월간 사회클럽을 꾸리고 병원 신문을 만드는 일에 함께했어요.
1953년에는 알제리의 블리다-주앙빌 정신병원으로 옮겨 제5병동 책임자가 됐어요.
환자가 2천 명이 넘는 북아프리카 최대 규모 병원이었어요.
파농은 여기서 의사와 환자 사이의 상하 관계를 낮추고, 알제리 사람들의 문화적 전통을 존중하고, 병원 안에 카페와 사교클럽을 열었어요.
환자를 관리 대상이 아니라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으로 대한 거예요.
이건 당시 식민지 정신의학의 인종주의적 관행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었어요.
1956년, 파농은 알제리 총독부에 사직서를 냈어요.
요지는 이랬어요.
체계적으로 비인간화하는 환경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어항의 물을 그대로 두고 물고기만 고치는 일을 더는 못 하겠다는 선언이었어요.
병원을 나온 그는 알제리민족해방전선에 합류했고, 나중에는 알제리 임시정부의 가나 주재 대사로 일했어요.
의사 가운을 벗고 정치로 간 게 아니라, 그가 보기엔 둘이 같은 일이었어요.
파농에게는 '폭력의 사도'라는 꼬리표가 오래 붙어 있었어요.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걸 오독으로 봐요.
비평가들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1장 폭력론만 읽고, 마지막 장인 '식민 전쟁과 정신질환'을 지나쳤기 때문이에요.
장폴 사르트르가 쓴 서문이 폭력을 실제보다 크게 그린 것도 오해를 키웠어요.
파농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부인 조지 파농은 이 서문을 책에서 빼려고까지 했어요.
| 널리 퍼진 통념 | 자료가 말하는 것 |
|---|---|
| 폭력을 예찬한 사상가다 | 1장만 읽은 결과로, 마지막 장은 전쟁이 사람의 정신을 어떻게 부수는지 다룬 임상 기록이에요 |
| 추상적인 정치철학이다 | 1954년부터 1959년까지 블리다-주앙빌과 알제리민족해방군에서 직접 치료한 환자 사례를 A·B·C·D로 나눠 실었어요 |
| 흑인 환자 이야기다 | 유럽인 환자와 알제리인 환자가 모두 들어 있어요 |
그 마지막 장은 피에 젖은 무자비한 분위기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관행이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보여줘요.
고문한 사람도 고문당한 사람도 함께 무너져요.
폭력을 권하는 글이 아니라, 폭력이 치르게 하는 값을 세는 글에 가까워요.
1952년에 나온 이 책은 파농이 살아서 낸 두 권 중 첫 번째예요.
제목 그대로예요.
피부는 검은데 하얀 가면을 써야 사람 대접을 받는 상황, 그 안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헷갈리게 되는 마음을 다뤄요.
책에 널리 인용되는 장면이 하나 있어요.
길에서 백인 아이가 파농을 가리키며 "저기 봐, 검둥이야!"라고 외쳐요.
그 한마디에 파농은 한 사람의 의사이자 참전 군인이 아니라 그냥 피부색 덩어리로 굳어 버려요.
파농은 이걸 '인종적 표피 도식'이라고 불렀어요.
시선 하나로 사람이 껍데기에 못 박히는 경험이에요.
그렇게 사람이 대화 상대가 아니라 관리할 '문제'로만 취급되는 자리를 그는 '비존재의 영역'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덧붙일 게 있어요.
파농은 흑인의 자긍심을 되찾자는 네그리튀드 운동을 '심각한 흑인 신기루'라고 비판했지만, 단순한 반대자는 아니었어요.
그 운동이 흑인들이 자기 자신을 느끼는 방식을 바꿔 놓았다는 점은 인정했거든요.
본질로 돌아가자는 건 거부하면서도, 그 힘은 봤어요.
파농은 1961년 12월 6일, 백혈병으로 투병하다 미국 메릴랜드주의 한 병원에서 이중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서른여섯이었어요.
마지막 몇 달의 경위를 두고는 아직도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어요.
기억할 건 세 가지예요.
첫째, 그는 마음의 병을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사람이 놓인 환경의 결과로 읽었어요.
둘째, 그래서 어항의 물을 두고 물고기만 고치는 일을 그만뒀어요.
셋째, 그의 정치적 주장은 책상에서 나온 게 아니라 병동에서 환자를 마주하며 나온 거예요.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인용돼요.
"오 나의 몸이여, 나를 항상 질문하는 인간으로 만들어다오."
답을 쥔 사람의 말은 아니에요.
진료실에서 하루치 환자를 다 보고 나온 사람이, 그래도 내일 다시 묻겠다고 적어 둔 문장에 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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