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사원인론과 자연의 사다리, 리케이온에서 남긴 강의 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칼키디키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나 기원전 322년 에우보이아 칼키스에서 세상을 떠난 고대 그리스 철학자예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서 스무 해 가까이 배운 뒤 아테네에 리케이온을 세워 논리학, 자연학, 생물학, 정치학에 걸친 강의를 남겼습니다. 사물이 존재하고 변하는 이유를 네 가지 원인으로 나눠 설명한 사원인론과, 레스보스섬에서 직접 동물을 들여다보며 쌓은 관찰 기록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어요.
| 항목 | 내용 |
|---|---|
| 생몰 | 기원전 384년 칼키디키 스타게이라 출생, 기원전 322년 에우보이아 칼키스 사망 |
| 가족 |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2세의 시의, 어머니 파이스티스는 에우보이아 칼키스 출신 |
| 활동지 | 아테네 아카데메이아, 아소스와 레스보스, 마케도니아 펠라와 미에자, 아테네 리케이온 |
| 학파 | 페리파토스학파(소요학파) |
| 대표 저작 | 오르가논(후대 편집본), 자연학, 형이상학(후대 명칭), 동물지, 동물발생론, 동물운동론, 동물부분론, 기상학, 영혼론, 정치학, 아테네인의 국제 |
| 핵심 개념 | 사원인론(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 4원소와 아이테르, 자연의 사다리 |
| 1차 자료 문제 | 현존 저작 대부분은 기원전 335년부터 323년 사이 아테네 시기의 강의 초고로 여겨집니다(학계 추정). 오르가논이라는 6권 체계와 형이상학이라는 제목은 모두 기원전 1세기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편집하며 붙인 것이에요 |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인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부터 자연학, 생물학, 기상학, 정치학까지 학문 거의 전 분야에 강의와 저술을 남긴 고대 그리스의 백과전서적 학자예요. 기원전 384년 칼키디키의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나 기원전 322년 에우보이아의 칼키스에서 생을 마쳤습니다(영어 위키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특징은 책상 위에서만 따지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레스보스섬의 석호에 나가 동물을 들여다보고, 호수가 마르고 삼각주가 자라는 지질 변화를 기록하고, 소금물을 증발시켜 담수가 되는지 확인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존재란 무엇인가를 묻는 제1철학도 함께 다뤘어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후대의 호칭은 그 위상을 잘 보여줍니다. 이슬람 학자들은 그를 '제1의 스승'이라 불렀고,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중세 기독교 학자들은 이름 대신 그냥 '그 철학자'라고만 적어도 누구를 말하는지 모두가 알았어요(영어 위키백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어떻게 배웠나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2세의 시의였고, 어머니 파이스티스는 에우보이아 칼키스 출신이었어요(위키백과, 영어 위키백과). 왕궁 의사의 아들로 자랐다는 배경은, 그가 훗날 몸과 생물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은 태도와 겹쳐 읽히곤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문이 전설적 의사 아스클레피오스와 그 아들 마카온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것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고대부터 내려온 전승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모를 모두 일찍 여의고 프록세노스라는 인물의 후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일곱에서 열여덟 살 무렵 아테네로 옮겨가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들어갔고, 플라톤이 세상을 떠난 기원전 348년에서 347년 무렵까지 스무 해 가까이 그곳에 머물렀어요. 배운 기간만 놓고 보면 그는 무엇보다 오래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아테네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나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를 떠난 이유로는 두 가지가 전해집니다. 플라톤 사후 아카데메이아의 수장 자리가 스페우시포스에게 넘어간 데 대한 실망, 그리고 당시 아테네에 퍼져 있던 반마케도니아 정서예요. 그는 크세노크라테스와 함께 아소스로 떠났습니다(영어 위키백과).
아소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옛 동문인 아타르네우스의 헤르미아스에게 초청을 받았고, 헤르미아스의 양녀이자 조카인 피티아스와 결혼해 딸을 낳았어요. 딸의 이름도 어머니와 같은 피티아스였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테오프라스토스와 함께 식물학과 해양생물학 연구를 진행했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로 돌아온 것은 기원전 335년,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된 이듬해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아테네 체류였고, 이후 기원전 323년까지 열두 해 동안 강의하고 연구했어요. 현존하는 저작 대부분이 바로 이 시기의 강의 초고로 여겨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을 어떻게 가르쳤나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43년에서 342년 무렵 필리포스 2세의 초청으로 마케도니아의 펠라에 가서, 열세 살이던 알렉산더를 가르쳤어요. 수업은 미에자에 있던 '님프의 정원'이라는 사립학교에서 이뤄졌습니다(영어 위키백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에게 준 선물 중에는 자신이 직접 주석을 단 『일리아스』 사본이 있었다고 전해져요. 알렉산더는 이 책을 가장 아끼는 소지품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에게 했다는 조언으로는 '그리스인에게는 지도자로, 이방인에게는 전제군주로'(a leader to the Greeks and a despot to the barbarians)라는 말이 전해집니다. 다만 이런 종류의 말들은 대체로 후대의 전승 형태로 기록되어 있어요.
리케이온과 소요학파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리케이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 세운 학교의 이름으로, 아폴론 리케이오스의 신성한 숲 이름에서 따온 것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메틱, 곧 외국인 거주자 신분이라 아테네에서 부동산을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건물을 사지 못하고 임대해서 학교를 열었습니다(영어 위키백과).
소요학파라는 이름은 그 건물에 딸린 김나시온과 회랑에서 나왔어요. 회랑을 뜻하는 그리스어 페리파토스(peripatos)가 학파 이름이 된 것이고, 그래서 페리파토스학파, 우리말로는 소요학파라 부릅니다. 걸어 다니며 강의했다는 인상적인 이름이 사실은 건물 구조에서 온 셈이에요.
사원인론이 무슨 뜻인가요
사원인론은 어떤 것이 왜 존재하고 왜 변하는지를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이라는 네 가지 물음으로 나눠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에요. 『자연학』에서 제시했습니다(영어 위키백과, 위키백과).
네 원인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어떤 형태인가',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각각 묻습니다. 하나의 사물을 두고 네 가지 답이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에요. 원인을 하나로 좁히지 않고 층으로 쌓아 본 겁니다.
네 원인 가운데 목적인(telos)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그는 가능태와 현실태를 논하면서 이런 예를 들었어요. '동물은 시각을 갖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니라, 보기 위해 시각을 갖는다'(For animals do not see in order that they may have sight, but they have sight that they may see). 기능이 먼저 있고 기관이 그 기능을 위해 있다는 뜻이에요.
4원소와 아이테르는 무엇을 설명하려던 건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엠페도클레스가 제시한 흙, 물, 공기, 불의 4원소를 뜨거움, 차가움, 습함, 건조함이라는 네 가지 감각 성질과 짝지어 설명했어요. 그리고 여기에 천상을 이루는 신적 물질인 아이테르, 곧 제5원소를 더했습니다(영어 위키백과, 위키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은 이 체계 위에서 작동했습니다. 『자연학』 215a25 대목에서 그는 낙하 속도가 무게에 비례하고 매질의 밀도에 반비례한다는 취지의 서술을 남겼어요. 그리고 이 관계를 밀고 나가면 매질이 없는 진공에서는 속도가 무한대가 되는 모순이 생기므로, 진공은 존재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진공을 부정한 이 논증은 결론만 보면 낯설지만, 구조는 눈여겨볼 만해요. 자기 이론에서 모순되는 귀결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그 귀결로 다른 주장을 논박하는 방식이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을 어떻게 관찰하고 분류했나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레스보스섬, 특히 피라 석호에서 두 해에 걸쳐 동물을 관찰했고, 그 자료가 『동물지』, 『동물발생론』, 『동물운동론』, 『동물부분론』에 담겼어요(영어 위키백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약 500종의 동물을 구분하고 이를 '피 있는 동물'과 '피 없는 동물'로 크게 나눴습니다. 오늘날의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에 대체로 대응하는 구분이에요. 그리고 이들을 완전한 정도에 따라 등급을 매겨 '자연의 사다리'로 배열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찰이 얼마나 실물에 밀착해 있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문어예요. 그는 두족류의 육완이 생식에 쓰인다고 기술했는데, 이 기록은 19세기까지 널리 불신받다가 나중에 사실로 확인됐습니다. 또 그는 상어가 태반을 갖는 것처럼 자기 분류 체계에 들어맞지 않는 예외들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적어뒀어요. 현대 생물학은 이를 수렴진화로 설명합니다.
관찰의 범위는 동물에 그치지 않았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호수가 사라지고 사막에 하천이 생기고 나일 삼각주가 자라는 변화를 기록하면서, 이런 변화는 한 사람의 생애 안에 관찰하기엔 너무 느리다고 적었습니다. 지진은 땅속에 갇혀 빠져나가려는 기체나 증기 때문이라고 봤는데, 이는 아낙사고라스,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 같은 선배 학자들의 견해를 따른 것이에요. 소금물 실험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소금물을 증발시키면 담수가 되고, 응결된 수증기는 다시 바닷물로 응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은 누가 붙였나요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는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이 쓴 말이 아니라, 기원전 1세기에 그의 저작을 편집한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에게서 유래한 후대의 명칭이에요. 안드로니코스가 해당 저술들을 『자연학』 뒤(meta)에 배치한 데서 나온 이름입니다(위키백과, 영어 위키백과).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이 영역을 '제1철학'(prote philosophia) 또는 '신학'(theologike)이라 불렀어요.
안드로니코스의 편집은 논리학 저작에도 미쳤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술들은 그의 손을 거쳐 『오르가논』이라는 6권 체계로 묶였어요. 범주론, 명제론, 분석론 전서, 분석론 후서, 토피카, 소피스트적 논박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는 순서와 묶음이 상당 부분 이 편집자의 손을 거쳤다는 뜻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생을 마쳤나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22년 데모필루스와 히에로판테스 에우리메돈에게 불경죄로 고발당하자 어머니의 고향인 칼키스로 피신했어요(영어 위키백과). 이때 그가 '아테네인들이 철학에 대해 두 번 죄를 짓게 하지 않겠다'(I will not allow the Athenians to sin twice against philosophy)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처형을 가리킨 말이지만, 원자료에도 '그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는 형태로 적혀 있어 확정된 인용은 아니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내 피티아스가 세상을 떠난 뒤 스타게이라 출신 헤르필리스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따 니코마코스라 지었습니다. 유언에서는 제자 안티파트로스를 유언집행자로 지정하고, 아내 곁에 묻히기를 청했어요.
사인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서술이 다릅니다. 영어 위키백과는 '자연사'라고만 적고, 한국어 위키백과는 위장병으로 63세의 생애를 마쳤다고 더 구체적으로 기록해요. 같은 사건을 두고 자료의 상세도가 갈리는 대목이니, 사인을 단정해서 인용하지 않는 편이 안전합니다.
후대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어떻게 평가했나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이슬람 학자들은 그를 '제1의 스승'이라 불렀고 중세 기독교 학자들은 '그 철학자'라고만 적었지만, 근현대에는 혹평도 만만치 않았어요(영어 위키백과).
찬사 쪽에서는 찰스 다윈의 1882년 편지가 유명합니다. '린네와 퀴비에는 나의 두 신이었지만, 그들도 늙은 아리스토텔레스 앞에서는 그저 초등학생일 뿐이었다.' 문체에 관해서는 키케로가 그의 글을 '황금이 흐르는 강'이라 묘사했다고 전해져요(위키백과).
혹평 쪽에서는 버트런드 러셀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혐오스럽다'고, 논리학을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만큼이나 명백히 낡았다'고 평했습니다. 다만 러셀은 그런 오류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역사적으로 정당하게 평가하기 어려워진다면서도, 그가 모든 선대 학자들에 비해 얼마나 큰 진보를 이루었는지는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어요. 생물학자 피터 메더워는 1985년에도 그의 저작을 '풍문과 불완전한 관찰, 희망적 사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순진함이 뒤섞인 기이하고 대체로 지루한 잡동사니'라고 평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은 지구 밖 지명에도 남아 있어요. 그는 『기상학』에서 남반구 고위도에 육지가 있을 것이라 처음 추측했는데, 그때 붙인 이름이 오늘날 '남극(Antarctica)'의 어원이 됐습니다. 남극의 아리스토텔레스산맥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에요. 한편 『아테네인의 국제』 원고 일부는 1891년에 재발견됐습니다(위키백과).
흔히 오해하는 것들
통념: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학술 용어다.
실제로는 그가 쓴 적 없는 말이에요. 기원전 1세기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그의 저작을 편집하면서 『자연학』 뒤에 배치한 데서 나온 후대의 명칭이고,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은 '제1철학' 또는 '신학'이라고 불렀습니다(위키백과, 영어 위키백과).
통념: 아리스토텔레스의 낙하 이론은 갈릴레오가 실험으로 완전히 틀렸음을 증명했다.
요안네스 필로포누스와 갈릴레오가 실험으로 반박했다고 전해지지만,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공기 같은 유체 매질 속 지구 중력장이라는 조건 안에서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그 적용 범위에서는 틀리지 않았다는 반론을 제기했어요. 단순히 '틀렸다'로 끝낼 수 없고 해석이 갈리는 지점입니다. 다만 그의 운동 이론에서 도출되는, 힘이 질량과 속도의 곱에 비례한다는 관계는 현대 물리학에서 틀린 것으로 확인됩니다.
통념: 아리스토텔레스는 진화론을 미리 내다봤다.
그의 생물학 저술이 종의 형태 변화나 적응을 다루기 때문에 그렇게 읽히기도 하지만, 그는 서로 다른 종이 공통 조상을 가진다거나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변한다거나 종이 멸종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엠페도클레스의 적자생존식 기원론을 비판했고, 돌연변이와 잡종은 자연적 원인과 구별되는 드문 사고로 봤습니다.
통념: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라톤 비판은 늘 정확했다.
20세기 학계는 그가 『영혼론』에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곧 영혼이 공간을 차지하고 물체와 접촉할 수 있다는 주장을 비판한 대목이 실제로는 플라톤을 오독한 결과라고 봅니다. 스승에 대한 비판이라고 해서 언제나 정확하게 겨냥한 것은 아니었어요.
통념: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류학의 아버지다.
그가 분류학 자체에 관심이 있었는지를 두고 학계 의견이 갈립니다. 일부 과학철학자들은 그가 분류학에 관심이 없었다고 결론지었지만 동물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보고, 최근 연구는 그가 분류학과 생물학적 명명법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해요.
통념: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의 독살에 관여했다.
고대에 이 소문이 널리 퍼진 것은 사실이지만, 뒷받침하는 근거는 알렉산더 사후 약 6년 뒤에 나온 신빙성 낮은 주장 하나뿐이에요.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널리 퍼진 억측입니다.
통념: 그의 가문은 전설적 의사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손이다.
이는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고대의 전승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자주 묻는 질문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제 어디서 태어나 언제 죽었나요?
기원전 384년 칼키디키의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나 기원전 322년 에우보이아의 칼키스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사인에 대해 영어 위키백과는 자연사라고만 적고, 한국어 위키백과는 위장병으로 63세의 생애를 마쳤다고 더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밑에서 얼마나 오래 배웠나요?
열일곱에서 열여덟 살 무렵 아테네로 옮겨가 아카데메이아에 들어갔고, 플라톤이 세상을 떠난 기원전 348년에서 347년 무렵까지 약 20년을 그곳에서 보냈어요.
소요학파라는 이름은 왜 붙었나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임대해 학교로 쓴 리케이온 건물에 딸린 김나시온과 회랑, 곧 페리파토스(peripatos)에서 온 이름이에요. 리케이온이라는 이름 자체는 아폴론 리케이오스의 신성한 숲에서 따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왜 강의 초고라고 하나요?
기원전 335년부터 323년까지 아테네에서 열두 해 동안 강의하고 연구했는데, 현존하는 저작 대부분이 이 시기의 강의 초고로 여겨지기 때문이에요(학계 추정). 오르가논이라는 6권 체계와 형이상학이라는 제목은 기원전 1세기 안드로니코스의 편집에서 나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어떻게 봤나요?
『정치학』에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다'(man is by nature a political animal)라고 했어요. 같은 책에서 '정치적 공동체는 함께 사는 것 자체가 아니라 고귀한 행위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도 적었습니다.
정리
아리스토텔레스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유를 나눠 묻고 실물을 직접 들여다본 사람이에요. 사원인론은 '왜'라는 물음을 네 갈래로 갈라놨고, 레스보스의 석호에서 쌓은 관찰 기록은 자기 분류에 안 맞는 예외까지 지우지 않고 남겼습니다.
그 결과가 전부 옳았던 것은 아닙니다. 진공을 부정한 논증도, 운동 이론에서 나온 힘과 속도의 관계도 지금은 성립하지 않아요. 러셀과 메더워의 혹평은 그 지점을 겨냥합니다. 그런데도 다윈은 린네와 퀴비에를 그 앞에서 초등학생이라 불렀고, 문어의 육완에 관한 기록은 2천 년이 지나 사실로 확인됐어요.
읽을 때 기억해둘 것은 그의 책 상당수가 남의 손을 거쳐 지금 모습이 됐다는 점입니다. 오르가논이라는 묶음도, 형이상학이라는 제목도 안드로니코스의 편집이었어요.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는 순서부터가 이미 후대의 해석입니다.
참고 자료
- 영어 위키백과
- 위키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