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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윌러드 밴 오먼 콰인은 1908년에 태어나 2000년에 세상을 떠난 미국의 논리학자이자 분석철학자예요. 1951년 논문 "Two Dogmas of Empiricism"에서 분석과 종합의 구분과 환원주의를 공격해 당시 주류였던 논리실증주의를 무너뜨렸고, 인식론을 심리학의 한 장으로 다시 놓자는 자연화된 인식론을 제시했어요. 하버드 대학교에서 1956년부터 1978년까지 Edgar Pierce Chair of Philosophy 교수직을 맡았습니다.
| 항목 | 내용 |
|---|---|
| 생몰 | 1908년 6월 25일 ~ 2000년 12월 25일 |
| 전통 | 미국 분석철학, 수리논리학 |
| 활동지 | 하버드 대학교 (Edgar Pierce Chair of Philosophy, 1956~1978) |
| 학력 | 오벌린 칼리지 수학 학사(1930, summa cum laude), 하버드 철학 박사(1932, 지도교수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
| 대표 저작 | Word and Object(1960), From a Logical Point of View(1953/1980), Mathematical Logic(1940/1951), Set Theory and Its Logic(1963/1969), The Web of Belief(1970, 공저) |
| 대표 논문 | "Truth by Convention"(1936), "On What There Is"(1948), "Two Dogmas of Empiricism"(1951), "Epistemology Naturalized"(1969) |
| 핵심 개념 | 분석-종합 구분 비판, 의미론적 총체주의, 존재론적 상대성, 번역의 비결정성, 자연화된 인식론 |
| 논리·수학 기여 | Quine–McCluskey 알고리즘, 집합론 New Foundations(NF) |
| 미해결 쟁점 | NF가 다른 수학적 형식체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일관적인지는 아직 미해결 문제 |
윌러드 밴 오먼 콰인은 20세기 미국 분석철학을 대표하는 논리학자이자 철학자예요. 1908년 6월 25일에 태어나 2000년 1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1956년부터 1978년까지 Edgar Pierce Chair of Philosophy 교수직을 맡았습니다.
콰인의 출발점은 철학이 아니라 수학이었어요. 오벌린 칼리지에서 1930년에 수학 학사를 최우등으로 받았고, 하버드에서 1932년에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지도교수가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였어요. 논리학에서 철학으로 건너온 이 경로가 그의 작업 전체를 설명해 줍니다. 콰인이 던진 질문들은 대체로 "이 말이 참인지 어떻게 확인하나"보다 "이 말이 무엇을 존재한다고 약속하고 있나" 쪽이었어요.
콰인은 언어에도 놀라울 만큼 능했어요. 모국어인 영어 말고도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로 강의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브라질에서 포르투갈어로 논리학을 강의했어요 (영어 위키백과).
콰인은 학자 집안이 아니라 제조업 집안에서 자랐어요. 아버지 클로이드 로버트 콰인은 타이어 금형을 만드는 Akron Equipment Company를 세운 기업가였고, 어머니 해리엇 엘리스 밴 오먼은 교사였습니다. 콰인 자신은 아홉 살 무렵 무신론자가 되었고 평생 그 입장을 유지했어요.
콰인의 철학을 결정한 사건은 1932년부터 1933년까지의 유럽 여행이었어요. Sheldon Fellowship을 받아 유럽을 돌면서 얀 우카시에비치, 스타니스와프 레시니에프스키, 알프레트 타르스키 같은 폴란드 논리학자들을 만났고, 루돌프 카르납을 포함한 비엔나 서클 회원들과 논리실증주의자 A. J. 에이어를 만났습니다. 특히 프라하에서 만난 카르납의 영향으로 철학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되었고, 훗날 카르납을 자신의 "진정하고 유일한 maître à penser(스승)"라고 불렀어요.
이 인연은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어요. 콰인은 1939년 9월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Unity of Science Congress에 타르스키를 초청했는데, 유대인이었던 타르스키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기 직전 단치히를 떠나는 마지막 배를 타고 탈출했습니다.
전쟁 중 콰인은 미 해군 군사정보 부서에서 독일 잠수함 메시지를 해독하는 임무를 맡아 소령급(lieutenant commander) 계급에 올랐어요.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었고 도덕적 검열을 옹호하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경험주의의 두 도그마"는 콰인이 1951년 논문 "Two Dogmas of Empiricism"에서 공격한 두 가지 전제를 가리켜요. 하나는 분석 명제와 종합 명제를 깔끔하게 나눌 수 있다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 있는 진술이라면 감각 경험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환원주의예요. 이 논문은 The Philosophical Review 60권 20~43쪽에 실렸고, 나중에 From a Logical Point of View(1953)에 수록됐습니다.
분석 명제는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처럼 말뜻만으로 참이 되는 문장이고, 종합 명제는 "밖에 비가 온다"처럼 세상을 봐야 참인지 알 수 있는 문장이라고 여겨져 왔어요. 논리실증주의는 이 구분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콰인은 이 구분을 명료하게 정의하려는 시도가 결국 동어반복으로 돌아온다는 점을 보이면서, 둘 사이에 원리적인 경계선이 없다고 주장했어요.
대신 콰인이 내놓은 것이 의미론적 총체주의와 존재론적 상대성이에요. 문장 하나가 따로 경험과 마주하는 게 아니라 믿음 전체가 한 덩어리로 경험과 마주한다는 생각이죠. 논문 결론부에서 콰인은 이렇게 씁니다. "As an empiricist I continue to think of the conceptual scheme of science as a tool, ultimately, for predicting future experience in the light of past experience... Both sorts of entities enter our conceptions only as cultural posits." 경험주의자로서 과학의 개념 체계를 결국 과거 경험에 비추어 미래 경험을 예측하는 도구로 본다는 뜻이고, 물리적 대상이든 추상적 대상이든 우리 개념 안에는 문화적 상정으로만 들어온다는 말이에요 (영어 위키백과).
자연화된 인식론은 지식을 정당화하는 작업을 철학이 과학 바깥에서 심판하듯 하지 말고, 아예 자연과학의 한 분과로 들어가서 하자는 제안이에요. 콰인이 1969년 논문 "Epistemology Naturalized"에서 제시했습니다.
전통 인식론은 과학이 정당한지를 과학보다 앞선 자리에서 판정하려 했어요. 콰인은 그런 바깥 자리가 없다고 봤습니다. 우리가 감각 자극을 받아 이론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이미 심리학이 연구하는 실제 현상이니까요. 그의 말은 이렇습니다. "Epistemology, or something like it, simply falls into place as a chapter of psychology and hence of natural science... a conspicuous difference between old epistemology and the epistemological enterprise in this new psychological setting is that we can now make free use of empirical psychology." 인식론이 심리학의, 따라서 자연과학의 한 장으로 그냥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고, 옛 인식론과의 눈에 띄는 차이는 이제 경험 심리학을 마음껏 써도 된다는 점이라는 뜻이에요.
이 태도는 콰인의 유명한 경구 "philosophy of science is philosophy enough", 즉 과학철학이면 철학으로 충분하다는 말과 이어져요. 실제로 콰인은 분석철학자 대부분처럼 철학사에 관심이 적었고, 1946년 데이비드 흄에 관한 강의를 딱 한 번 한 것이 그의 철학사 강의 전부였습니다.
가바가이(gavagai) 사고실험은 행동으로 관찰 가능한 데이터만으로는 한 단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예요. 콰인이 Word and Object(1960) 2장에서 번역의 비결정성(indeterminacy of translation) 논제를 도입하면서 든 사례입니다.
상황은 이래요. 언어학자가 아무도 모르는 원주민 언어를 처음 조사하러 갔는데, 토끼가 지나가자 화자가 "gavagai"라고 외칩니다. 언어학자는 이 말을 "토끼"로 옮기고 싶어지겠죠. 그런데 콰인은 묻습니다. 이 말이 "분리되지 않은 토끼-부분들"을 뜻하는 게 아니라고 무엇으로 배제하나요. 두 해석은 관찰 가능한 모든 행동 데이터에 똑같이 들어맞아요. 화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상황도, 부정하는 상황도 완전히 같습니다.
콰인이 여기서 끌어내는 결론은 의미가 행동을 넘어서는 어떤 확정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Word and Object는 콰인이 쓴 것 중 철학적 논고에 가장 가까운 저작이고, 이 장에서 그는 행동주의적 의미이론을 함께 주장했습니다.
힐러리 퍼트넘은 이 논제를 두고 "칸트의 범주의 초월적 연역 이후 가장 매혹적이고 가장 많이 논의된 철학적 논증"이라고 평했어요 (영어 위키백과).
"To be is to be the value of a variable", 즉 "존재한다는 것은 변항의 값이 되는 것이다"는 어떤 이론이 무엇의 존재를 약속하고 있는지를 판정하는 콰인의 기준이에요. 1948년 Review of Metaphysics 2권 5호에 실린 논문 "On What There Is"에서 나왔습니다.
뜻은 이래요. 어떤 이론이 무엇을 존재한다고 보는지 알고 싶으면, 그 이론의 주장을 논리 기호로 다시 쓴 다음 "어떤 x가 있어서..."라는 양화 구문에서 x 자리에 무엇이 들어가야 그 주장이 참이 되는지를 보면 됩니다. 이 기준은 콰인의 존재론적 개입(ontological commitment) 개념의 핵심이에요.
같은 논문에서 콰인은 러셀의 기술이론(theory of descriptions)을 명료화했고, '추상적 대상(abstract object)'이라는 용어와 빈 이름의 문제를 가리키는 '플라톤의 수염(Plato's beard)'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어요. 플라톤의 수염이 나오는 대목은 이렇습니다. "Suppose now that two philosophers, McX and I, differ over ontology... This tangled doctrine might be nicknamed Plato's beard; historically it has proved tough, frequently dulling the edge of Occam's razor."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얽힌 교설을 플라톤의 수염이라 부를 만하고, 역사적으로 이 수염은 질겨서 오컴의 면도날을 자주 무디게 만들었다는 말이에요.
논문 첫머리에서 콰인은 존재론 문제의 기묘함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A curious thing about the ontological problem is its simplicity. It can be put into three Anglo-Saxon monosyllables: 'What is there?' It can be answered, moreover, in a word—'Everything'—and everyone will accept this answer as true." 존재론 문제의 이상한 점은 그 단순함이고, 세 음절로 "무엇이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으며 "전부 다"라는 한 단어로 답할 수 있고 누구나 그 답을 참으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뒤앙-콰인 논제(Duhem–Quine thesis)는 어떤 가설도 홀로 실험에 부쳐질 수 없고 언제나 배경 가정들과 한 덩어리로 검증된다는 주장이에요. 콰인이 피에르 뒤앙의 전체론에 동의하면서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붙게 됐습니다.
다만 적용 범위가 달라요. 뒤앙의 전체론은 물리학, 넓게 봐도 자연과학에 국한된 주장이었어요. 콰인은 이것을 인간 지식 전체로 확장했습니다. 수학도 논리학도 예외가 아니라는 거죠. 이 확장이 있었기 때문에 앞서 본 분석-종합 구분 비판이 성립해요. 어떤 문장도 경험과 홀로 마주하지 않는다면, 경험과 아예 무관하게 참인 문장이라는 범주도 특별한 지위를 잃으니까요.
같은 전체론적 태도는 콰인이 J. S. 울리언과 함께 쓴 The Web of Belief(1970)로 이어지는데, 이 책은 일종의 정합주의(coherentism)를 옹호합니다.
콰인은 철학자이기 이전에 논리학자였고, 논리학과 집합론 양쪽에 구체적인 결과물을 남겼어요.
논리학에서 콰인은 1차논리, 즉 고전적 이가 논리만을 논리로 인정했어요. 고차논리는 "변장한 집합론"이라고 불렀고, 양화 양상논리(quantified modal logic)에는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이 반대는 결과적으로 진 싸움이었어요. 이후 솔 크립키의 관계의미론이 표준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교재 집필 일화도 콰인다워요. 1940년 학부 강의를 맡은 콰인은 기존 교재들이 양화이론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걸 발견하고, Elementary Logic을 6주 만에 써버립니다.
집합론에서는 경력에 걸쳐 세 가지 공리적 집합론을 제시했어요. New Foundations(NF), Mathematical Logic의 집합론, Set Theory and Its Logic의 집합론입니다. R. B. 옌센이 만든 NF의 수정판 NFU는 urelements를 허용하는데, 페아노 산술에 대해 상대적 일관성이 증명됐어요. 다만 NF 자체가 다른 수학적으로 적합한 형식체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일관적인지는 아직 미해결 문제입니다. NF 커뮤니티에 후보 증명들이 있을 뿐 확정된 증명은 아니에요.
공학 쪽으로도 흔적을 남겼어요. 콰인은 에드워드 J. 매클러스키와 함께 불 방정식을 최소 피복 소항의 합으로 축소하는 Quine–McCluskey 알고리즘을 고안했습니다 (영어 위키백과).
콰인의 영향은 제자 명단에서 바로 드러나요. 하버드에서 데이비드 루이스, 길버트 하먼, 다그핀 푈레스달, 하오 왕 등의 박사논문 지도를 도왔습니다.
동료와의 공동 작업도 있었어요. 하버드 동료 힐러리 퍼트넘과 함께 수학적 실재론을 옹호하는 콰인-퍼트넘 불가결성 논증(Quine–Putnam indispensability argument)을 발전시켰습니다. 수학적 대상이 과학 이론에 없어서는 안 되니 그 존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증인데, 앞서 본 "존재한다는 것은 변항의 값이 되는 것이다"라는 기준과 곧바로 연결돼요.
영향은 철학 바깥으로도 새어 나갔어요. 더글러스 호프스태터가 1979년 저서 『괴델, 에셔, 바흐』에서 자신의 소스코드를 그대로 출력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콰인의 이름을 따 'quine'이라 부르는 용법을 처음 도입했습니다. 지금도 프로그래머들은 이런 프로그램을 그냥 콰인이라고 불러요.
공식적인 인정도 이어졌습니다. 1980년에는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콰인의 말년은 기억이 무너져 가는 시간이었어요. 제자 다그핀 푈레스달의 증언에 따르면 콰인은 심각한 단기기억 손실을 겪었고, Word and Object 개정 작업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2000년 크리스마스에 이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알츠하이머로 추정돼요.
이 시기에 콰인이 모튼 화이트에게 한 말이 위키피디아에 기록돼 있어요. "I do not remember what my illness is called, Althusser or Alzheimer, but since I cannot remember it, it must be Alzheimer." 내 병 이름이 알튀세르인지 알츠하이머인지 기억이 안 나는데,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알츠하이머인 모양이라는 말입니다.
말장난이 워낙 그럴듯해서 재치 있는 일화로만 소비되기 쉬운데, 그렇게 읽으면 맥락이 왜곡돼요. 이 말은 자신의 병명조차 붙잡지 못하던 실제 인지저하 상태에서 나온 것이고, 그 사실까지 포함해야 일화가 온전해집니다.
통념: 콰인은 논리실증주의자다.
실제로는 논리실증주의를 무너뜨린 쪽이에요. 콰인은 카르납을 스승이라 부를 만큼 비엔나 서클과 가까웠지만, 1951년 "Two Dogmas of Empiricism"에서 분석-종합 구분과 환원주의를 공격해 당시 유행하던 논리실증주의를 약화시켰습니다. 가까웠기 때문에 정확히 급소를 칠 수 있었던 셈이에요.
통념: 콰인은 검증주의자다.
콰인은 보통 검증주의와 연관되지 않아요. 다만 일부 철학자들은 하버드 동료 B. F. 스키너의 『Verbal Behavior』식 언어 분석을 근거로, 콰인의 일반 철학과 검증주의가 양립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콰인 본인은 궁극적 근거가 행동이 아니라 신경학에 있다고 믿었어요.
통념: 콰인은 현대 논리학의 모든 기법을 아우른 논리학자다.
그의 논리학 연구는 이후 관점에서 일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돼요. analytic tableaux, 재귀함수, 모델이론 같은 기법을 다루지 않았고, 『Mathematical Logic』에는 건전성 증명과 완전성 증명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통념: 콰인의 집합론 New Foundations는 검증이 끝난 체계다.
NF가 다른 수학적으로 적합한 형식체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일관적인지는 아직 미해결 문제예요. NF 커뮤니티에 후보 증명들이 있지만 확정된 증명은 아닙니다. 반면 R. B. 옌센의 수정판 NFU는 페아노 산술에 대한 상대적 일관성이 증명됐어요.
통념: 임종 무렵의 알튀세르-알츠하이머 발언은 순수한 재치다.
콰인 특유의 언어유희인 건 맞지만, 자기 병명조차 기억하지 못하던 실제 인지저하 상태를 보여주는 일화예요. 재치로만 서술하면 맥락이 왜곡됩니다.
콰인이 말한 경험주의의 두 도그마는 정확히 무엇인가요?
첫째는 분석 명제와 종합 명제를 원리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믿음이고, 둘째는 의미 있는 진술이 감각 경험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환원주의예요. 콰인은 1951년 논문 "Two Dogmas of Empiricism"에서 이 둘을 공격하고 대신 의미론적 총체주의와 존재론적 상대성을 옹호했습니다.
가바가이는 무슨 뜻인가요?
가바가이는 콰인이 Word and Object(1960) 2장에서 만든 가상의 원주민 말이에요. 화자가 토끼를 보고 "gavagai"라고 외칠 때, 행동으로 수집할 수 있는 데이터만으로는 그 말이 "토끼"를 뜻하는지 "분리되지 않은 토끼-부분들"을 뜻하는지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프로그래밍에서 말하는 콰인이 이 콰인인가요?
맞아요. 자신의 소스코드를 그대로 출력하는 프로그램을 'quine'이라 부르는 용법은 더글러스 호프스태터가 1979년 저서 『괴델, 에셔, 바흐』에서 콰인의 이름을 따 처음 도입했습니다.
콰인의 대표 저작 한 권을 고른다면 무엇인가요?
Word and Object(1960)예요. 콰인이 쓴 것 중 철학적 논고에 가장 가까운 저작이고, 번역의 비결정성 논제와 행동주의적 의미이론이 여기서 나옵니다. 논문 단위로는 "On What There Is"(1948)와 "Two Dogmas of Empiricism"(1951)이 대표작이에요.
콰인은 카르납과 어떤 사이였나요?
콰인은 1932년부터 1933년까지의 유럽 여행 중 프라하에서 카르납을 만나 철학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됐고, 카르납을 자신의 "진정하고 유일한 maître à penser(스승)"라 불렀어요. 그러면서도 훗날 카르납이 속했던 논리실증주의의 핵심 전제를 무너뜨린 사람이 콰인입니다.
콰인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철학이 과학 바깥에 설 자리가 없다고 말한 논리학자예요. 분석과 종합의 경계선을 지우자 경험과 무관하게 참인 문장이라는 안전지대가 사라졌고, 남은 것은 통째로 경험과 마주하는 믿음의 그물뿐이었습니다. 인식론이 심리학의 한 장으로 내려앉은 것도, 존재론이 "변항의 값"이라는 논리적 절차 문제가 된 것도 같은 움직임의 다른 얼굴이에요.
동시에 콰인은 모든 싸움에서 이긴 사람은 아니었어요. 양화 양상논리 반대는 크립키 이후 사실상 진 싸움이 됐고, 그의 논리학 저작은 이후 기준으로는 빠진 기법이 많으며, 자신이 만든 집합론 NF의 일관성 문제는 지금도 열려 있습니다. 그런 미완의 항목들까지 포함해서, 20세기 분석철학이 어디를 지나왔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이름이 콰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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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윌러드 콰인
Willard Van Orman Quine
1908년
분석과 종합의 구분을 허문 분석철학자.

루돌프 카르납
Rudolf Carnap
1891년
검증할 수 있는 것만 의미 있다 한 논리실증주의자.

힐러리 퍼트넘
Hilary Putnam
1926년
의미는 머릿속에만 있지 않다 한 분석철학자.

플라톤
Plato
기원전 428년
현실 너머에 완전한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고 본 사람.

솔 크립키
Saul Kripke
1940년
이름과 필연을 다시 본 논리철학자.

데이비드 흄
David Hume
1711년
인과도 습관일 뿐, 경험을 끝까지 의심한 회의주의자.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1872년
논리와 평화를 함께 추구한 분석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Louis Althusser
1918년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만든다 본 마르크스주의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1861년
세계를 고정된 사물이 아닌 과정으로 본 철학자.

오컴의 윌리엄
William of Ockham
1287년
단순한 설명이 낫다, 오컴의 면도날.

이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년
네 행동이 모두의 법칙이 될 수 있게 하라, 의무의 윤리학.

윌러드 콰인
Willard Van Orman Quine
1908년
분석과 종합의 구분을 허문 분석철학자.

루돌프 카르납
Rudolf Carnap
1891년
검증할 수 있는 것만 의미 있다 한 논리실증주의자.

힐러리 퍼트넘
Hilary Putnam
1926년
의미는 머릿속에만 있지 않다 한 분석철학자.

플라톤
Plato
기원전 428년
현실 너머에 완전한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고 본 사람.

솔 크립키
Saul Kripke
1940년
이름과 필연을 다시 본 논리철학자.

데이비드 흄
David Hume
1711년
인과도 습관일 뿐, 경험을 끝까지 의심한 회의주의자.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1872년
논리와 평화를 함께 추구한 분석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Louis Althusser
1918년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만든다 본 마르크스주의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1861년
세계를 고정된 사물이 아닌 과정으로 본 철학자.

오컴의 윌리엄
William of Ockham
1287년
단순한 설명이 낫다, 오컴의 면도날.

이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년
네 행동이 모두의 법칙이 될 수 있게 하라, 의무의 윤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