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농 민족문화론, 전통은 창고에서 꺼내는 게 아니었다
프란츠 파농은 민족문화를 옛날에 만들어져 어딘가 보관돼 있는 유산이 아니라, 사람들이 지금 함께 싸우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봤어요. 그래서 해방을 향한 투쟁을 빼놓고 미리 완성돼 있는 민족문화란 없다고 했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왜 해방을 말했을까
프란츠 파농은 1925년 카리브해의 섬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어요.
직업은 철학자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였습니다.
1953년쯤부터 알제리의 블리다-주앵빌 정신병원 원장으로 일했는데, 그때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였어요.
그의 진료실에는 고문을 한 사람과 고문을 당한 사람이 둘 다 환자로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파농의 생각이 자랐어요.
마음이 아픈 사람을 아무리 치료해도, 사람을 아프게 만드는 세상 자체가 그대로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3년쯤 일한 뒤 1956년 12월, 알제리 총독에게 사직서를 냈습니다.
편지에서 그는 식민주의를 "거짓과 비겁함, 인간에 대한 경멸의 조직"이라고 불렀어요.
사직서를 내자마자 쫓겨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실제 추방은 한 달 뒤인 1957년 1월이었어요.
파농은 1961년 12월 6일 미국 메릴랜드에서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대표작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1952년에,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해인 1961년에 나왔습니다.
민족문화는 무슨 뜻일까
보통 '우리 문화'라고 하면 박물관 유리장 안에 놓인 물건이 떠오르죠.
조상이 만들어 뒀고, 우리는 잘 보관만 하면 되는 것처럼요.
파농은 반대로 봤어요.
문화는 유리장이 아니라 김장에 가깝습니다.
김치가 문화인 게 아니라, 해마다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담그고 나눠 먹는 그 일이 문화라는 거예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제4장 '민족문화에 관하여'에서 그는 민족문화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한 민족이 스스로를 만들어내고 계속 존재하게 해온 그 행동을, 생각의 영역에서 설명하고 정당화하고 기리려고 기울인 노력 전부라고요.
그러니까 민족문화는 명사보다 동사에 가까워요.
이미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무언가를 해내는 동안 그 옆에서 같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식민지에서 배운 사람은 어떤 길을 걸을까
파농은 식민지에서 지배자의 학교를 다닌 지식인들이 대체로 세 단계를 거친다고 정리했어요.
| 단계 | 어떤 모습 | 파농이 본 한계 |
|---|---|---|
| 1단계 | 지배자의 문화를 완벽하게 익혔다고 증명하려 한다 | 남의 옷을 잘 입는 재주일 뿐 |
| 2단계 | 식민 이전의 옛 문화로 돌아가려 한다 | 이미 그 문화의 바깥사람이 됐다 |
| 3단계 |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글을 쓴다 | 여기서야 진짜 민족의 정체성이 나온다 |
2단계가 특히 아픈 지점이에요.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간 사람이 사투리를 어색하게 흉내 내는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
마음은 진심인데, 몸은 이미 손님이 된 상태죠.
파농은 그 어색함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인정하되, 거기 머물지는 말라고 했어요.
진짜 뿌리는 뒤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사람들과 함께 만드는 일 속에 있으니까요.
아프리카를 한 덩어리로 묶으면 될까
당시에는 흑인의 자부심을 되찾자는 네그리튀드 운동이 큰 흐름이었어요.
파농은 1955년 에세이 '서인도인과 아프리카인'에서 이 운동이 대륙을 향해 품는 향수를 두고 "거대한 흑인 신기루 속에 사는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왜일까요.
아프리카는 나라도 언어도 역사도 제각각인데, '흑인 문화' 하나로 묶어 버리면 아랍계 아프리카인 같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에요.
학교 전체를 '우리 애들'로 뭉뚱그리면 정작 각자 겪는 일이 안 보이는 것과 비슷하죠.
그래서 그는 문화를 나라 단위에서 다뤄야 한다고 봤습니다.
다만 파농이 네그리튀드를 통째로 내친 건 아니에요.
존재를 설명하는 이론으로는 어설프다고 보면서도, 흑인들이 자기 자신을 대하는 감정을 바꿔 놓은 힘은 인정했습니다.
'파농은 네그리튀드 반대자'라고 외우면 절반을 놓치는 셈이에요.
억눌린 전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세이 '베일을 벗은 알제리'에서 그는 베일 같은 전통이 허상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라고 했어요.
대신 혁명이 끝난 뒤에는 그 전통이 지금도 맞는지 다시 따져 봐야 한다고 덧붙였고요.
독립하면 다 끝나는 걸까
파농이 가장 걱정한 대목이 여기예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제3장 제목이 '민족의식의 함정'입니다.
독립 뒤에 권력을 잡는 사람들, 그러니까 민족 부르주아지라 불린 새 지배층을 그는 아주 냉정하게 봤어요.
스스로 산업을 일으킬 힘이 없는 취약한 중산층이라 결국 옛 지배국이 하던 자리를 흉내만 낸다는 겁니다.
국기와 국가만 바뀌고 사람들의 삶은 그대로인 상태죠.
그럴 때 민족의식은 "텅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경고했어요.
이름만 남고 알맹이가 없는 동아리처럼요.
그래서 파농에게 민족문화와 해방은 두 가지 일이 아니라 한 가지 일입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함께 움직이며 만들어낸 것만이 알맹이가 되니까요.
폭력을 정화하는 힘이라고 한 말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파농 하면 따라붙는 문장이 있어요.
제1장 '폭력에 관하여'에 나오는, 개인 차원에서 폭력이 정화하는 힘이 되어 식민지 사람을 열등감과 절망과 무기력에서 풀어 준다는 대목입니다.
이 문장은 폭력 자체를 찬양한 말로 자주 오해받아요.
하지만 연구자들은 정신과 의사였던 그의 언어에 가깝게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억압 아래서 마비되고 얼어붙은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임상적인 뜻에 가깝고, 알제리 독립전쟁이라는 특정한 상황 안에서 나온 말이라는 거예요.
하나 더 있어요.
"유럽인 한 명을 죽이는 것은 일석이조다"라는 험한 문장은 파농이 쓴 게 아닙니다.
장폴 사르트르가 이 책 서문에 쓴 문장인데 자꾸 파농의 말로 인용돼요.
인용하기 전에 누가 한 말인지 확인하는 게 좋습니다.
정리
파농의 민족문화론은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우리다움은 창고에서 꺼내는 게 아니라 함께 만드는 동안 생긴다는 것이죠.
미리 준비된 민족의식도, 그것을 혼자 구상해 주는 천재나 선지자도 없다고 그는 봤어요.
그래서 옛 전통으로 돌아가는 일만으로는 부족하고, 아프리카 전체를 한 덩어리로 묶는 방식도 누군가를 지우게 되며, 독립만 하고 삶이 그대로면 민족의식은 껍데기로 남습니다.
물론 파농의 생각에도 비판이 따라요.
아프리카가 하나로 뭉치는 일을 강조하면서 아랍의 노예무역 같은 과거의 갈등을 덮자고 한 대목은 역사의 차이를 눌러 버린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그의 사상을 실존주의로 읽는 학자와 후기구조주의로 읽는 학자가 갈리고, 최근에는 오래 묻혀 있던 그의 정신의학 저술을 다시 읽는 작업도 진행 중이에요.
헨리 루이스 게이츠 주니어는 이렇게 사람마다 다르게 읽히는 모습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이는 로르샤흐 검사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블리다의 병원을 그만두고 알제리에서 쫓겨난 그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 나온 1961년 12월 메릴랜드의 병실에서 눈을 감았어요.
결론을 다 써 놓고 떠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