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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시몬 베유가 말한 주의는 이를 악물고 파고드는 집중력이 아니에요. 내 생각을 잠시 멈추고 마음을 비워서, 눈앞의 사람이나 문제가 있는 그대로 들어올 자리를 내주는 태도예요.
친구가 울면서 다가왔다고 해볼게요.
우리는 보통 듣기도 전에 머릿속을 굴려요.
또 그 일이겠지, 어제도 저랬는데, 이럴 땐 이렇게 말해 주면 되겠다.
이미 답을 정해놓고 듣는 거예요.
시몬 베유는 그건 주의가 아니라고 봤어요.
내 판단을 잠깐 내려놓고 상대가 무슨 일을 겪는 중인지 그냥 기다리는 상태, 그게 주의예요.
베유는 1909년 파리에서 태어나 1943년 영국에서 서른넷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 철학자예요.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나와 1931년부터 1938년까지 여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1934년 무렵에는 약 스물네 주 동안 자동차 공장에 미숙련 여성 노동자로 들어가 직접 일했어요.
1936년에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가 끓는 기름 냄비를 밟아 크게 데어 전선에서 물러났고요.
책상에서만 사유한 사람이 아니라, 몸으로 겪은 것을 개념으로 만든 사람이에요.
주의라는 개념도 그 한가운데서 나왔어요.
헷갈리기 쉬운 지점이에요.
우리가 아는 집중은 대개 힘을 주는 일이에요.
미간을 찌푸리고 문제를 붙잡고 늘어지는 거죠.
베유는 주의를 정반대로 설명했어요.
근육을 쓰는 노력이 아니라 '부정적 노력'이라고요.
힘을 주는 게 아니라 힘을 빼는 쪽에 가깝다는 뜻이에요.
| 흔히 말하는 집중력 | 베유가 말한 주의 | |
|---|---|---|
| 힘의 방향 | 내가 대상을 붙잡아 끌어당김 | 대상이 내 안으로 들어오게 둠 |
| 몸의 느낌 | 근육을 조이듯 힘이 들어감 | 힘을 빼고 기다림 |
| 원하는 것 | 빨리 답을 얻기 | 답이 안 나와도 머물기 |
| 베유의 표현 | 근육적 노력 | 부정적 노력 |
1942년 에세이에서 베유는 이렇게 적었어요.
"주의란 우리의 생각을 멈춰 세우고, 그것을 초연하고 텅 빈 상태로, 대상이 뚫고 들어올 수 있게 두는 일이다."
물컵을 손에 꽉 쥐는 게 아니라, 컵을 놓을 빈자리를 책상 위에 만들어 두는 쪽이에요.
베유가 든 예가 재미있어요.
어떤 학생이 기하 문제 하나를 한 시간 동안 붙들었는데 끝내 못 풀었어요.
성적표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죠.
그런데 베유는 그 '열매 없는 노력'이 영혼에 빛을 더한다고 봤어요.
그 한 시간이 언젠가 전혀 다른 데서, 이를테면 시 한 구절이 왜 아름다운지 알아차리는 순간에 결실을 맺는다는 거예요.
같은 에세이에서 베유는 공부하며 기울이는 주의가 기도를 위한 훈련이라고 했고, 기도 자체를 "영혼이 낼 수 있는 모든 주의를 신에게 향하게 하는 일"로 설명했어요.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도 남는 게 있어요.
답이 안 나오는 시간을 견디는 훈련은 답 자체보다 오래 남는다는 것.
문제집 채점란만 보는 눈으로는 놓치는 이야기예요.
주의의 바탕에는 베유가 만든 '탈창조'라는 말이 있어요.
자아를 비워 신이 들어올 자리를 내주는 과정을 가리켜요.
여기서 오해가 자주 생겨요.
자기를 비우라니, 결국 자기를 없애라는 말 아니냐고요.
베유는 그 둘을 딱 잘라 구분했어요.
탈창조는 만들어진 것을 만들어지기 전 상태로 돌리는 일이고, 파괴는 만들어진 것을 아예 없음으로 밀어 넣는 일이에요.
그리고 파괴를 "탈창조의 비난받을 대체물"이라고 못 박았어요.
방을 비워 손님을 들이는 것과 방에 불을 지르는 것은 다르다는 이야기예요.
자기부정과 자기파괴를 같은 말로 읽으면 베유를 거꾸로 읽는 셈이에요.
베유의 죽음이 이 오해를 부추기기도 해요.
베유는 나치 점령 아래 프랑스 동포가 받는 배급량 이상은 먹지 않겠다며 식사를 줄였고, 사망진단서에는 굶주림과 폐결핵에 따른 심근 퇴행이 적혔어요.
다만 이 죽음을 '단식 끝의 자살'로 요약하는 건 너무 성급해요.
폐결핵 합병증, 거식증 가능성, 전쟁 중의 연대감 같은 요인이 얽혀 있어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갈리거든요.
베유에게는 malheur라는 고통 개념이 있어요.
우리말 한 단어로 옮기기 어려운 말이에요.
다치거나 아픈 육체적 고통과는 달라요.
사회적 굴욕과 마음의 무너짐과 몸의 아픔이 한꺼번에 한 사람을 통째로 관통할 때에만 생기는 상태, 인격에 '노예의 낙인'을 남기는 고통이에요.
공장에서 스물네 주를 보낸 경험이 이 개념 뒤에 있어요.
이런 고통 앞에서 조언은 대개 빗나가요.
그래서 베유는 이웃 사랑의 핵심을 아주 짧은 한 문장으로 정리했어요.
그에게 "당신은 무엇을 겪고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 것.
성배 전설에서 병든 왕에게 던져야 했던 바로 그 질문이에요.
조언도 해석도 아니고, 질문 하나예요.
1942년 4월 13일 조에 부스케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문장도 있어요.
"주의는 가장 드물고 가장 순수한 형태의 너그러움이다."
덧붙이면, 베유의 주요 저작인 《중력과 은총》, 《뿌리내림》, 《신을 기다리며》는 모두 베유가 죽은 뒤 다른 사람이 노트와 편지를 묶어 낸 책이에요.
학계에서는 이 주의가 정말 수동적인 것인지 아니면 오래 훈련된 실천인지, 신앙을 빼고도 성립하는지를 두고 지금도 의견이 갈려요.
베유의 주의는 세 가지로 기억하면 좋아요.
첫째, 힘을 주는 집중이 아니라 힘을 빼는 기다림이에요.
둘째, 나를 비우는 건 나를 없애는 게 아니라 상대가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일이에요.
셋째, 그 자리에서 나오는 말은 조언이 아니라 질문이에요.
그래서 오늘 해볼 수 있는 건 의외로 작아요.
누가 힘든 이야기를 꺼낼 때, 대답을 준비하는 대신 3초만 더 기다려 보는 것.
답이 안 나오는 문제를 붙든 한 시간을 낭비로 세지 않는 것.
서른넷에 멈춘 한 사람이 공장과 전선과 병실을 거쳐 남긴 말치고는 조용하고, 그래서 오래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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