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코멘트
0
개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1806년 5월 20일 런던 펜톤빌에서 태어나 1873년 5월 7일 프랑스 아비뇽에서 세상을 떠난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예요. 『자유론』(1859)에서 어떤 의견도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사회적 박해나 정치적 탄압으로 막아서는 안 된다는 위해원칙을 세웠고, 『정치경제학원리』(1848)에서는 노동자들이 자본을 공동 소유하는 협동조합 사회를 그렸어요. 하원의원이던 1869년에는 의회 안에서 처음으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항목 | 내용 |
|---|---|
| 생몰 | 1806년 5월 20일 런던 펜톤빌 출생, 1873년 5월 7일 프랑스 아비뇽 사망 |
| 가족 |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출신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제임스 밀, 6남매 중 장남 |
| 경력 |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1858년까지 35년 근무,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 학무위원장(18651868), 런던 웨스트민스터 선거구 하원의원(18651868) |
| 대표 저작 | 『논리학체계』(1843), 『정치경제학원리』(1848), 『자유론』(1859), 『공리주의』(1861), 『대의정부론』(1861), 『여성의 종속』(1869) |
| 사후 출간 | 『자서전』(1873), 『종교에 대하여』(1874), 『사회주의론』(1879) |
| 핵심 개념 | 위해원칙, 정체상태의 재해석, 노동자 협동조합, 여성 참정권, 고율 상속세 |
| 배우자 | 해리어트 테일러, 21년 교제 끝에 1851년 결혼, 1858년 사망 |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주의 정치철학과 정치경제학을 함께 다룬 19세기 영국의 사상가예요. 1806년 5월 20일 런던 펜톤빌에서 태어나 1873년 5월 7일 프랑스 아비뇽에서 숨졌고, 아내 해리어트 테일러 곁에 묻혔어요(위키백과).
밀의 삶은 두 축으로 움직였어요. 하나는 저술이에요. 논리학에서 정치경제학, 자유와 대의정부, 여성의 지위까지 30년 넘게 주요 저작을 냈어요. 다른 하나는 실무와 정치예요.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35년을 일했고, 1865년부터 1868년까지는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 학무위원장과 웨스트민스터 선거구 하원의원을 겸했어요.
밀을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아버지 제임스 밀이에요.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을 전담했고, 제러미 벤담과 프란시스 플레이스가 이따금 도왔어요. 밀이 자란 환경 자체가 공리주의 진영의 한복판이었던 셈이에요.
존 스튜어트 밀은 학교가 아니라 아버지 제임스 밀에게서 고전어와 논리학, 정치경제학을 차례로 배웠어요. 세 살에 그리스어를 시작해 여덟 살이 되기 전 이솝의 『우화들』,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그리스어 원전으로 읽었어요(위키백과).
여덟 살부터는 라틴어와 유클리드 기하학, 대수를 배우면서 동생들의 가정교사 노릇도 했어요. 열 살에는 플라톤과 데모스테네스의 원전을 그리스어로 술술 읽는 수준이 됐고, 아버지가 『영국령 인도의 역사』를 출판할 무렵인 열두 살에는 스콜라철학 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저서를 원전으로 공부했어요.
열세 살 무렵 시작한 정치경제학 공부는 나중에 실제 책이 됐어요. 아버지의 지도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를 읽으며 작성한 보고서가 제임스 밀의 『정치경제학 요론』 초고가 됐거든요. 리카도는 아버지의 가까운 친구여서 소년 밀을 자주 집으로 불러 정치경제학을 놓고 대화를 나눴어요.
밀 자신은 이 교육을 이렇게 회고했어요. "그 교수법은 한 사람의 사상가를 양성하기 위한 것으로는 빼어난 고안이었지만... 모든 것을 나로 하여금 스스로 찾아내게 함으로써 내 능력을 활성화하려고... 나를 그 분야에 관한 독자적인 사상가로 만들었다." 답을 주는 대신 찾게 만드는 방식이었다는 뜻이에요.
존 스튜어트 밀은 스물한 살에 신경쇠약을 겪었고, 이 경험을 『자서전』 제5장에 직접 남겼어요. 학문적 훈련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본인 입으로 기록한 대목이라 자주 인용돼요(위키백과).
회복의 계기는 논증이 아니라 문학이었어요. 마르몽텔의 〈어느 아버지의 회상〉과 워즈워스의 시에서 위안을 얻었고, 밀은 그 과정을 "구름이 점차로 걷혔다"고 표현했어요.
이 시기 전후로 밀은 이미 공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1823년 친구들과 함께 '공리주의자 협회'를 결성했고, 열네 살 때는 제러미 벤담의 동생 사뮤엘 벤담의 가족과 프랑스에서 1년을 보내며 몽펠리에 과학대학에서 화학과 동물학, 논리학 강의를 들었어요. 파리에서는 경제학자 세이의 집에 묵으며 생시몽을 비롯한 저명인사들을 만났고요.
밀의 위해원칙(harm principle)은 표현이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어떤 의견도 사회적 박해나 정치적 탄압으로 막아서는 안 된다는 원리예요.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근거를 '남에게 주는 직접적 피해' 하나로 좁힌 것이 핵심이에요(위키백과).
다만 밀은 무제한을 말하지 않았어요. 굶주린 군중 앞에서 곡물상을 선동하는 식의 직접적인 표현 방식은 제한될 수 있다고 봤어요. 의견의 내용이 아니라 그 의견이 전달되는 상황과 방식이 곧바로 피해를 일으킬 때를 구분한 거예요.
『자유론』은 1859년에 나왔어요. 이 책은 아내 해리어트 테일러가 사망한 직후 출간됐고, 밀 스스로 그녀의 영향으로 많은 수정이 이루어졌다고 밝혔어요.
밀의 위해원칙은 20세기 미국 헌법 판례로 이어졌어요. 20세기 초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 올리버 웬델 홈즈가 밀의 위해원칙을 기초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 기준을 세웠거든요(위키백과).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보장하고 어디서부터 막을 수 있는지를 가르는 법적 기준이 철학책 한 권에서 출발했다는 뜻이에요. 밀이 곡물상 사례로 들었던 '직접성'이라는 조건이 법정에서 쓰이는 판단 기준으로 옮겨간 셈이고요.
해리어트 테일러는 밀의 아내이자, 밀 본인이 저작에 영향을 줬다고 인정한 사람이에요.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해리어트는 이미 유부녀였고, 21년의 교제 끝에 1851년 결혼했어요(위키백과).
결혼 생활은 7년으로 끝났어요. 1858년 밀이 동인도회사를 사직하고 함께 프랑스를 여행하던 도중 해리어트가 아비뇽에서 폐충혈로 사망했거든요. 밀은 그녀를 그곳에 묻고 작은 집을 사서 여생의 안식처로 삼았어요. 15년 뒤 밀도 아비뇽에서 숨져 아내 곁에 묻혔고요.
『자유론』에 그녀의 영향으로 많은 수정이 있었다는 것은 후대의 추측이 아니라 밀이 직접 밝힌 내용이에요.
존 스튜어트 밀은 잉글랜드 성공회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진학을 거절했어요. 대신 아버지를 따라 영국 동인도회사에 들어가 1858년까지 35년간 근무했어요(위키백과).
종교와 거리를 둔 것은 이 선택만이 아니었어요. 밀은 아버지 제임스 밀의 영향으로 신앙을 가져본 적이 없고 기독교 교리를 부정했어요. 다만 당대에 기독교를 부인하는 일이 금기시됐기 때문에 종교에 관한 공개적 언급은 피했어요. 종교를 다룬 『종교에 대하여』가 사후인 1874년에 나온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아요.
남긴 말은 날이 서 있어요. "편협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종교(기독교)의 부활을 자랑하지만, 그것은 사실 지독한 편견의 부활과 다름없다."
존 스튜어트 밀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불렀어요. 다만 공산주의는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가 '극단적이고 혁명적인 사회주의'라 부른 공산주의는 개인의 자율성을 전적으로 부인한다고 봤기 때문이에요(위키백과).
밀이 그린 경로는 협동조합이었어요. 자본주의적 기업을 노동자 협동조합으로 대체하는 방식으로만 사회주의 사회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 때문에 초기 시장사회주의 이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아요. 그가 쓴 문장은 이래요. "인류가 계속해서 개선된다면 결국 우세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연합 형태는... 노동자들이 평등한 조건 하에 연합하여, 공동으로 사업을 수행하는 자본을 소유하고, 그들 스스로 선출하고 해임할 수 있는 관리자의 지휘 아래 일하는 것이다."
분배 문제에서도 구체적인 제안을 했어요. 상속은 기회균등의 원리를 침해하고 상속자에게는 불로소득이라는 이유로, 고율의 상속세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밀은 경제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정체상태(stationary state)를 위기가 아니라 다음 단계로 봤어요. 리카도가 수확체감과 이윤감소의 국면으로 분석한 것과 정반대 평가예요. 밀에게 정체상태는 인간이 물질적 경쟁을 넘어 존엄과 정의 같은 가치로 나아갈 수 있는 행복한 상태였어요(위키백과).
밀의 진술은 이렇게 남아 있어요. "자본과 부의 정체상태가 끔찍한 상태라는 고전학파의 주장에 나는 공감할 수 없다. 그러한 상태는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발전된 상황일 수 있다..."
성장의 필요성 자체를 조건부로 봤다는 점도 눈에 띄어요. "더 이상의 경제성장을 필요로 하는 국가들은 기아에 허덕이는 후진국들뿐이다. 선진 공업국들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합리적 분배와 건전한 사회기풍(ethos)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1869년 의회 안에서는 최초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같은 해에 『여성의 종속』을 출간했고요(위키백과).
하원의원 임기는 1865년부터 1868년까지였고, 같은 기간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 학무위원장도 맡았어요. 책상에서 쓴 원리를 의사당 안에서 표결 가능한 요구로 옮긴 시기가 바로 이때예요.
존 스튜어트 밀의 영향은 법과 경제학, 그리고 사람으로도 이어졌어요.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 올리버 웬델 홈즈는 밀의 위해원칙에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기준을 끌어냈고, 노동자 협동조합 구상은 밀을 초기 시장사회주의 이론가로 자리매김하게 했어요(위키백과).
인식론에서도 뚜렷한 입장을 냈어요. 밀은 윌리엄 해밀턴이 대표하는 스코틀랜드 상식학파에 반대하면서, 외적 대상은 항상 감각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어요.
개인적인 연결도 있어요. 1872년 태어난 버트런드 러셀의 대부가 됐어요. 러셀의 모친이 요청한 일이었어요.
통념: 밀은 잉글랜드 성공회를 '하얀 악마'라고 불렀다.
실제로는 이 인용의 정확성이 확인되지 않았어요. 위키백과 원문 자체가 "정확한 인용인지 확인해야 할 내용"이라고 명시하고 있어요. 밀이 기독교 교리를 부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특정 표현을 밀의 말로 옮기는 것은 피하는 편이 안전해요.
통념: 밀은 세 살에 그리스어를 뗀 신화적 천재였다.
조기교육 서술 자체는 밀의 『자서전』 기술에 근거한 것으로 명시돼 있지만, 이 대목은 종종 과장되어 전해져요. 밀 본인이 남긴 회고의 초점은 재능이 아니라 교수법이었어요. 아버지가 답을 알려주는 대신 스스로 찾아내게 만들었다는 쪽이고요. '천재 조기교육' 프레임으로 부풀려 읽지 않는 편이 좋아요.
통념: 밀은 자유지상주의자라 국가 개입에 반대했다.
실제로는 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칭했어요. 고율의 상속세를 주장했고, 자본주의적 기업을 노동자 협동조합으로 대체하는 경로를 제시했어요. 그가 거부한 것은 개인의 자율성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즉 공산주의였어요.
주의가 필요한 서술.
위키백과 원문에 나오는 "스코토 옥소니안 헤이글(Scoto Oxonian Hegel)이 공론주의를 완벽하게 정의했다"는 대목은 문맥이 불분명하고 출처도 확인되지 않아요. 밀 이해의 근거로 삼지 않는 것이 안전해요.
존 스튜어트 밀은 언제 어디서 태어나고 죽었나요?
1806년 5월 20일 런던 펜톤빌에서 태어나 1873년 5월 7일 프랑스 아비뇽에서 사망했어요. 1858년 아비뇽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해리어트 테일러 곁에 묻혔어요.
밀의 위해원칙은 무엇인가요?
표현이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어떤 의견도 사회적 박해나 정치적 탄압으로 막아서는 안 된다는 원리예요. 다만 굶주린 군중 앞에서 곡물상을 선동하는 식의 직접적 표현 방식은 제한될 수 있다고 봤어요.
밀의 대표 저작은 무엇인가요?
『논리학체계』(1843), 『정치경제학원리』(1848), 『자유론』(1859), 『공리주의』(1861), 『대의정부론』(1861), 『여성의 종속』(1869)이에요. 『자서전』(1873), 『종교에 대하여』(1874), 『사회주의론』(1879)은 사후에 나왔어요.
밀은 어떤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나요?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1858년까지 35년간 근무했어요. 잉글랜드 성공회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진학을 거절하고 아버지를 따라 들어간 직장이었어요.
밀과 버트런드 러셀은 어떤 관계인가요?
밀은 1872년 태어난 버트런드 러셀의 대부가 됐어요. 러셀의 모친이 요청한 일이었어요. 밀은 이듬해인 1873년에 사망했어요.
존 스튜어트 밀을 한 줄로 줄이면 '자유의 한계선을 하나로 좁힌 사람'이에요. 자유를 제한할 근거는 남에게 주는 직접적 피해뿐이고, 그 외에는 다수의 불쾌감도 정부의 판단도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 이 단순한 기준이 훗날 미국 법정의 판단 기준으로 옮겨갔어요.
동시에 밀은 자유주의를 시장 옹호와 같은 말로 쓰지 않았어요. 고율 상속세를 주장하고 노동자 협동조합을 그렸고, 성장이 멈춘 상태를 재앙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읽었어요. 자율성을 지키는 방식의 사회주의를 찾으려 했다고 보는 편이 그의 글에 가까워요.
밀이 아비뇽에 산 작은 집은 아내를 묻은 자리 옆에 있었어요. 동인도회사를 그만두고 떠난 여행이 그렇게 끝났고, 그는 15년 뒤 같은 도시에서 같은 자리에 묻혔어요.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