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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데이비드 흄(1711~1776)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역사가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인과관계가 사실은 반복된 경험이 우리를 길들여 만든 습관일 뿐이라고 논증한 경험론의 정점입니다. 흄은 도덕이 이성이 아니라 정념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사실 진술만으로는 당위적 결론이 도출될 수 없다는 존재-당위 문제를 처음 명확히 서술한 인물로 대체로 인정받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1783년 《형이상학 서설》에서 흄의 저작이 자신을 독단의 잠에서 깨웠다고 밝혔습니다.
| 항목 | 내용 |
|---|---|
| 생몰 | 1711년 5월 7일(구력 4월 26일) 에든버러 로운마켓 출생, 1776년 8월 25일 사망 |
| 본명과 개명 | David Home으로 태어났고, 1734년 잉글랜드에서 Home의 발음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철자를 Hume으로 바꿈 |
| 활동지와 전통 | 에든버러, 프랑스 앙주의 라플레체, 파리 / 영국 경험론 |
| 대표 저작 |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173940), 《인간지성탐구》(1748), 《도덕원리탐구》(1751), 《영국사》 6권(175462),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
| 핵심 개념 | 인상과 관념(사본 원리), 흄의 포크, 인과와 습관, 귀납의 문제, 존재-당위 문제, 자아 다발 이론, 양립가능론 |
| 공직과 생업 | 변호사협회 도서관장(1752년부터), 파리 주재 영국대사관 서기관(1763~65), 북부담당 국무차관(1767) |
| 자료 충돌 | 아버지 이름을 영어 위키백과는 치른사이드의 변호사 Joseph Home, 한국어 위키백과는 존 흄으로 달리 적음 |
데이비드 흄은 아주 이른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 학위 없이 나온 뒤, 20대 내내 독학으로 읽고 쓰면서 자기 철학을 만든 사람입니다. 당시 일반적인 입학 연령이 열네 살이던 시절에 열두 살(열 살이라는 설도 있습니다)로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은 하지 않았습니다(영어 위키백과).
흄의 집안 사정도 이 독학의 배경이 됩니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아버지는 치른사이드의 변호사 Joseph Home으로 흄이 두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Catherine Home은 재혼하지 않고 세 자녀를 홀로 키웠습니다.
흄은 열여덟 살 무렵 철학에 대한 사고의 새로운 지평을 경험했다고 훗날 회고했습니다. 그 뒤로 다른 일을 다 제쳐두고 최소 십 년간 독서와 집필에만 매달리다 신경쇠약 직전까지 갔습니다. 손가락에 괴혈병 반점이 돋아 주치의에게 학자병(Disease of the Learned) 진단을 받았고, 매일 클라레 와인 한 파인트와 함께 강장제와 항히스테리 알약을 복용했다고 합니다.
1730년대에는 프랑스 앙주의 라플레체에 머물렀습니다. 데카르트가 수학한 것으로 알려진 예수회 계열 학교가 있던 곳으로, 흄은 그곳 도서관을 이용해 사 년에 걸쳐 원고를 썼고 1738년, 스물일곱 살에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완성했습니다.
흄의 주저는 출간 당시 사실상 실패했고, 무신론자로 의심받아 교수직도 두 번 거절당했습니다.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1739~40)는 당대 그레이트브리튼 비평가들에게 추상적이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을 받았고, 흄 자신도 자서전 「나의 삶」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It fell dead-born from the press, without reaching such distinction as even to excite a murmur among the zealots.” — 「나의 삶」(영어 위키백과)
교수직 도전도 막혔습니다. 1745년 에든버러 대학교의 프뉴마틱스 및 도덕철학 교수직에 지원했지만 무신론자로 간주되어 윌리엄 클랙혼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이후 글래스고 대학교 철학 수석교수직에 지원했을 때도 같은 이유로 실패했습니다. 이때는 그 자리를 비운 개인적 친구 애덤 스미스조차 여론을 우려해 임명에 반대했습니다.
흄이 당대에 얻은 명성은 철학이 아니라 역사에서 왔습니다. 1754년부터 1762년까지 낸 여섯 권짜리 《영국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공부터 1688년 혁명까지를 다뤘고, 당대 베스트셀러가 되어 1894년까지 최소 오십 판이 인쇄되었습니다. 이 책의 자료는 1752년부터 맡은 변호사협회 도서관장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급여는 거의 없었지만 대형 서고 이용권이 딸려 있었거든요.
인상과 관념은 흄이 인간 정신의 지각을 나눈 두 종류이고, 관념은 인상의 희미한 사본에 불과하다는 것이 《논고》 서두의 핵심 교리입니다. 훗날 학자들은 이를 사본 원리(copy principle)라고 불렀습니다(영어 위키백과).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손을 불에 데었을 때 느끼는 뜨거움이 인상이고, 나중에 그 일을 떠올릴 때 머릿속에 남는 흐릿한 감각이 관념입니다. 원본과 복사본의 관계인 셈인데, 복사본은 언제나 원본보다 흐립니다.
이 단순한 구분이 강력한 이유는 검증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념이 진짜 내용을 가지려면 그것이 베껴온 인상이 어딘가에 있어야 합니다. 대응하는 인상을 찾을 수 없는 관념은 정체를 의심받게 되고, 흄의 인과 분석은 정확히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흄의 포크(Hume's fork)는 인간 이성의 모든 대상을 관념의 관계와 사실의 문제 두 갈래로 나누는 구분입니다. 관념의 관계는 부정하면 모순이 되는 것으로 수학적 진리 등이 여기 속하고 선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의 문제는 부정을 상상해도 모순이 생기지 않는 것으로 오직 경험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영어 위키백과).
예를 들어 삼각형의 내각 합이 두 직각이 아니라고 말하면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반면 내일 해가 뜨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예상일 수는 있어도 모순은 아닙니다. 머릿속으로 얼마든지 그려볼 수 있으니까요.
이 구분은 흄 인과론의 토대가 됩니다. 원인과 결과에 관한 주장은 사실의 문제 쪽에 속하므로, 관념만 따져서 연역해낼 수 없습니다. 인과를 알려면 경험을 거쳐야 하는데, 바로 그 경험이 무엇을 보증해주는지가 다음 문제입니다.
흄은 원인이 결과를 필연적으로 낳는다는 믿음이 반복된 경험이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길들인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흄은 관념 연합의 원리를 유사성, 인접성, 인과관계 세 가지로 제시했고, 그중 습관(custom)이 미래에 대해 과거와 유사한 사건의 연쇄를 기대하게 만든다고 설명했습니다(영어 위키백과).
당구공 두 개를 떠올려 보면 감이 옵니다. 우리는 한 공이 다른 공을 맞히고 그 공이 굴러가는 장면을 수없이 봤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 어디에도 밀어냄이라는 힘 자체가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붙어서 일어남과 잇따라 일어남뿐이고, 필연이라는 느낌은 반복이 우리 안에 심어놓은 기대입니다. 흄은 이렇게 썼습니다.
“Power and necessity...are...qualities of perceptions, not of objects...felt by the soul and not perceiv'd externally in bodies.” —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다만 흄은 인과를 단순한 연쇄로 납작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반문합니다.
“Shall we rest contented with these two relations of contiguity and succession, as affording a complete idea of causation? By no means...there is a necessary connexion to be taken into consideration.”
그래서 흄의 인과론 해석은 지금도 갈립니다. 원인과 결과를 규칙적 연쇄로 환원하는 논리실증주의적 해석, 흄이 지각된 규칙성 너머의 필연적 연결을 인정했다고 보는 회의적 실재론, 사이먼 블랙번의 준실재론 세 갈래가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귀납의 문제는 자연이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균일하게 지속되리라는 원칙을 합리적으로 정당화할 길이 없다는 흄의 논증입니다. 흄은 두 갈래를 모두 막습니다. 논증적 추론으로는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자연이 균일하지 않다고 말해도 모순이 생기지 않으니까요. 개연적 추론으로도 안 됩니다. 귀납으로 귀납을 정당화하는 순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영어 위키백과).
그렇다면 우리는 왜 여전히 내일도 해가 뜬다고 믿을까요. 흄의 답은 이성이 아니라 자연적 본능이 이 실천을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근거가 있어서 믿는 게 아니라,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져 있어서 믿는다는 뜻이지요.
“Nature, by an absolute and uncontroulable necessity has determin'd us to judge as well as to breathe and feel.” —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흄은 경험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감각도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한쪽에 백 건, 다른 쪽에 오십 건의 사례가 있으면 기대는 불확실해지지만, 백 번의 균일한 실험에 반례가 단 하나뿐이라면 상당히 강한 확신이 생긴다는 식입니다. 정당화는 못 해도 정도의 차이는 남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흄은 도덕 판단이 이성이 아니라 정념과 감정에서 나온다고 보아, 《논고》에서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오직 노예여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Reason is, and ought only to be the slave of the passions, and can never pretend to any other office than to serve and obey them.” —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영어 위키백과)
이 말은 아무렇게나 살라는 뜻이 아니라 역할 분담에 관한 주장입니다. 이성은 수단을 계산하고 사실을 정리할 뿐, 무엇을 원할지는 정해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흄은 이렇게도 썼습니다.
“Morals excite passions, and produce or prevent actions. Reason of itself is utterly impotent in this particular. The rules of morality, therefore, are not conclusions of our reason.” —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1740)
여기서 존재-당위 문제가 나옵니다. 역사가들은 흄을 이 문제(흄의 법칙, 흄의 단두대라고도 불립니다)를 최초로 명확히 서술한 인물로 대체로 인정합니다. 사실이 이러이러하다는 진술만 늘어놓아서는 그러니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결론이 논리적으로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도덕 논쟁이 사실 확인만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를 짚은 셈입니다.
흄 자신은 도덕철학에서 후기작을 더 아꼈습니다. 1748년 첫 탐구(원제 Philosophical Essays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후일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 이어 1751년에 낸 《도덕원리탐구》를 두고, 자서전에서 자기 모든 저작 가운데 비교할 수 없이 최고라고 자평했습니다.
흄은 자아를 통일된 실체가 아니라 지각들의 다발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다발 이론(bundle theory)입니다. 흄은 자기 안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자아라는 것 자체는 잡히지 않고 그때그때의 지각만 걸린다고 썼습니다.
“For my part, when I enter most intimately into what I call myself, I always stumble on some particular perception or other, of heat or cold, light or shade, love or hatred, pain or pleasure. I never can catch myself at any time without a perception, and never can observe any thing but the perception. When my perceptions are removed for any time, as by sound sleep; so long I am insensible of myself, and may truly be said not to exist.”
이 발상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데릭 파핏은 《이성과 사람》에서 다발 이론의 현대판을 제시했습니다(영어 위키백과).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흄이 토머스 홉스와 함께 고전적 양립가능론자로 거론됩니다. 흄은 용어를 다시 정의하는 방식으로 자유와 결정론을 화해시켰습니다. 필연은 자연의 작용에서 관찰되는 균일성이고, 자유는 의지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으면 세계가 규칙적이라는 사실과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충돌하지 않습니다.
흄은 《인간지성탐구》 10절에서 기적을 신의 특별한 의지 행위 또는 보이지 않는 행위자의 개입에 의한 자연법칙의 위반으로 정의하고, 상반되는 증거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확률적 논변으로 기적에 대한 믿음의 합리적 근거가 박약함을 논증했습니다(영어 위키백과). 핵심은 불가능 선언이 아니라 증거 비교입니다. 자연법칙을 뒷받침하는 방대한 경험과, 기적을 전하는 증언의 신뢰도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를 재보라는 겁니다.
설계 논증에 대해서는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다른 각도로 접근했습니다. 유한한 수의 입자로 이루어진 유한한 우주가 무한한 시간 동안 무작위로 배열되면, 설계된 것처럼 보이는 세계도 우연히 나타날 수 있다는 논변입니다. 등장인물 필로의 입을 빌린 대목은 이렇습니다.
“Many worlds might have been botched and bungled throughout an eternity, ere this system was struck out: much labour lost: many fruitless trials made: and a slow, but continued improvement carried on during infinite ages in the art of world-making.” —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이 발상은 다윈의 자연선택보다 앞서 설계 없는 질서의 가능성을 제기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흄의 태도는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복부암으로 사망하기 몇 주 전 제임스 보즈웰을 만나 사후 세계가 있다는 것은 가장 비합리적인 상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유언으로는 이름과 생몰연도만 새긴 소박한 로마식 무덤을 요청했고, 실제로 에든버러 칼튼힐의 올드 칼튼 묘지에 그렇게 묻혔습니다.
흄이 남긴 가장 유명한 영향은 칸트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1783년 《형이상학 서설》에서 흄의 저작이 자신을 독단의 잠(dogmatic slumbers)에서 깨웠다고 밝혔습니다(영어 위키백과, 위키백과). 쇼펜하우어의 평가는 더 노골적입니다.
“there is more to be learned from each page of David Hume than from the collected philosophical works of Hegel, Herbart and Schleiermacher taken together.”
흄의 생애 후반은 철학자보다 공인에 가까웠습니다. 1763년부터 1765년까지 파리 주재 영국대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했고, 1766년에는 장자크 루소를 영국으로 데려왔지만 두 사람은 이후 불화해 흄이 분쟁 경위를 담은 글을 따로 써야 했습니다. 1767년에는 북부담당 국무차관을 지냈고, 죽기 직전인 1776년 4월에 다섯 쪽이 채 안 되는 짧은 자서전 「나의 삶」을 남겼습니다. 그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I cannot say there is no vanity in making this funeral oration of myself, but I hope it is not a misplaced one; and this is a matter of fact which is easily cleared and ascertained.”
임종을 앞두고 애덤 스미스에게 전했다는 농담도 전합니다. 뱃사공 카론에게 미신 체제가 무너지는 걸 볼 몇 년만 더 달라고 청하자 카론이 이렇게 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You loitering rogue, that will not happen these many hundred years.... Get into the boat this instant.”
흄에 대한 평가가 마냥 순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2014년 케임브리지대 펠릭스 발트만이 공개한 1766년 3월 편지에 따르면, 흄은 후원자 하트포드 경에게 그레나다 노예 농장 지분 매입 제안을 전달했습니다. 이것이 흄 자신의 적극적 권유였는지 단순한 정보 전달이었는지를 두고 휴턴과 애슈턴, 앨런 베일리, 제임스 피저 등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어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2020년 9월 에든버러 대학교는 흄의 인종 관련 저술에 반대하는 학생 운동 이후 David Hume Tower 건물 이름을 40 George Square로 바꿨습니다.
통념: 흄은 열여덟 살에 허치슨의 도덕감각론을 접하고 철학에 눈떴다.
실제로는 흄이 말한 사고의 새로운 지평이 무엇이었는지 흄 자신이 명시한 적이 없습니다. 허치슨의 도덕감각론이었으리라는 것은 현대 학자들의 유력한 추정 가운데 하나일 뿐 확정된 사실이 아닙니다(영어 위키백과).
통념: 흄은 인과란 규칙적 연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이것이 세 경쟁 해석(논리실증주의적 해석, 회의적 실재론, 준실재론)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흄은 단순한 인접과 연속 관계만으로 인과의 완전한 관념이 되겠느냐고 스스로 반문하며 필연적 연결을 고려해야 한다고도 썼습니다. 흄을 순수 규칙성 이론가로 못박는 것은 과장입니다.
통념: 흄은 기적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원문이 기적의 발생과 보고 가능성 자체를 열어둡니다. 논증의 핵심은 불가능 선언이 아니라 상충하는 증거의 상대적 무게를 저울질하는 확률적 논변입니다.
통념: 흄의 귀납 비판은 귀납을 쓰지 말라는 주장이다.
실제로는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흄은 귀납이 이성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논증하면서도, 그것이 자연적 본능과 습관에 의해 여전히 불가피하게 작동하는 실천이라고 보았습니다. 흄은 회의를 실천적 마비로 연결짓지 않았습니다.
통념: 흄은 무신론자였다.
동시대인들은 실제로 그렇게 여겼고 그 때문에 교수직에서 두 번 밀려났습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의 평가는 갈립니다. 폴 러셀은 불경(irreligion)을, 데이비드 오코너는 약한 이신론을 제시하는 등 순수 무신론으로 단정하지 않는 해석이 많습니다.
통념: 흄의 아버지는 존 흄이다.
자료가 서로 어긋납니다. 영어 위키백과는 치른사이드의 변호사 Joseph Home이라고 명시하는 반면 한국어 위키백과는 존 흄으로 적습니다. 영어 자료 쪽이 더 신뢰할 만하지만, 어느 한쪽을 재검증 없이 확정 사실처럼 쓰는 것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1745년 애너데일 가정교사 일화에서도 한국어 위키백과는 애너데일 후작부인이라는 여성형으로 표기하지만 영어 위키백과는 후작 본인(Marquess of Annandale)을 가르쳤다고 적습니다. 번역 과정의 오류로 보입니다.
통념: 흄의 자아 다발 이론은 불교의 무아에서 왔다.
둘을 연결짓는 해석(제임스 자일스)이나, 흄이 1730년대 프랑스 체류 중 불교 사상을 접했을 수 있다는 앨리슨 고프닉의 주장은 하나의 학설이자 추정입니다. 확정된 전기적 사실이 아닙니다.
데이비드 흄은 언제 어디서 태어났나요
1711년 5월 7일(구력 4월 26일) 에든버러 로운마켓 북쪽 공동주택에서 David Home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고, 1776년 8월 2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1734년 잉글랜드에서 Home의 발음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의 철자를 Hume으로 바꿨습니다.
흄의 포크가 무슨 뜻인가요
인간 이성의 모든 대상을 관념의 관계와 사실의 문제 두 갈래로 나누는 흄의 구분입니다. 관념의 관계는 부정하면 모순이 되는 수학적 진리 같은 것으로 선험적으로 알 수 있고, 사실의 문제는 부정을 상상해도 모순이 없어 경험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흄의 대표작은 무엇인가요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1739~40)가 주저이지만 출간 당시에는 실패했습니다. 이후 1748년 《인간지성탐구》, 1751년 《도덕원리탐구》를 냈고, 흄 자신은 후자를 자기 모든 저작 가운데 비교할 수 없이 최고라고 자평했습니다. 생전 명성은 1754년부터 1762년까지 낸 여섯 권짜리 《영국사》에서 왔습니다.
칸트는 흄에게서 무엇을 얻었나요
임마누엘 칸트는 1783년 《형이상학 서설》에서 흄의 저작이 자신을 독단의 잠에서 깨웠다고 밝혔습니다. 인과가 경험에서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흄의 논증이 칸트에게 결정적 자극이 되었다는 뜻으로 널리 인용됩니다.
「취미의 기준에 대하여」는 어떻게 쓰인 글인가요
1757년에 나온 이 글은 원래 계획에 없던 글입니다. 흄이 조언자 필립 스탠호프의 권유로 예정돼 있던 「영혼불멸론」과 「자살론」을 논문집에서 빼면서 분량이 너무 얇아지자, 출판업자의 요구로 서둘러 새로 써넣은 글이었습니다(스탠퍼드 철학백과).
흄의 작업은 결국 하나의 질문을 여러 방향으로 밀어붙인 결과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 가운데 실제로 경험이 보증해주는 몫은 어디까지인가. 인과에서는 필연이라는 느낌이 습관의 산물로 드러났고, 귀납에서는 자연의 균일성이 이성으로 떠받쳐지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고, 자아에서는 지각들 말고 붙잡히는 게 없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흄은 이 결과를 가지고 판단을 멈추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정당화되지 않아도 우리는 계속 기대하고 계속 판단합니다. 숨 쉬고 느끼듯이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흄의 회의가 냉소로 읽히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생전의 흄은 자기 철학책이 인쇄기에서 사산되었다고 적어야 했던 사람이고, 무신론자로 몰려 두 번이나 교수직에서 밀려난 사람이고, 역사책으로 겨우 이름을 얻은 사람입니다. 유언대로 이름과 생몰연도만 새긴 소박한 무덤이 에든버러 칼튼힐에 남아 있습니다.

데이비드 흄
David Hume
1711년
인과도 습관일 뿐, 경험을 끝까지 의심한 회의주의자.

이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년
네 행동이 모두의 법칙이 될 수 있게 하라, 의무의 윤리학.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
1588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그래서 강한 국가가 필요하다고 본 사람.

장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712년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어디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

애덤 스미스
Adam Smith
1723년
보이지 않는 손, 시장경제를 설명한 도덕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1872년
논리와 평화를 함께 추구한 분석철학자.

데릭 파핏
Derek Parfit
1942년
나란 무엇인가, 인격 동일성을 파고든 윤리학자.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근대 철학의 출발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1788년
세상의 본질은 맹목적 의지, 삶은 고통이라 본 염세 철학자.

데이비드 흄
David Hume
1711년
인과도 습관일 뿐, 경험을 끝까지 의심한 회의주의자.

이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년
네 행동이 모두의 법칙이 될 수 있게 하라, 의무의 윤리학.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
1588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그래서 강한 국가가 필요하다고 본 사람.

장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712년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어디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

애덤 스미스
Adam Smith
1723년
보이지 않는 손, 시장경제를 설명한 도덕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1872년
논리와 평화를 함께 추구한 분석철학자.

데릭 파핏
Derek Parfit
1942년
나란 무엇인가, 인격 동일성을 파고든 윤리학자.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근대 철학의 출발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1788년
세상의 본질은 맹목적 의지, 삶은 고통이라 본 염세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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