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폴 사르트르와 존재와 무, 자유가 형벌이 되는 자리
장폴 사르트르(1905년 6월 21일 ~ 1980년 4월 15일)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입니다. 1943년 에서 인간 존재를 즉자존재와 대자존재, 대타존재로 나누어 분석했고, 소설 와 희곡 같은 문학 작품으로도 자기 철학을 펼쳤습니다.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수상을 거절한 일로도 널리 알려져 있어요.
| 항목 | 내용 |
|---|---|
| 생몰 | 1905년 6월 21일 ~ 1980년 4월 15일 |
| 출생지 | 파리 16구 미냐르로 13번지, 외조부 집 |
| 전통 | 무신론적 실존주의, 현상학 |
| 대표 철학서 | (1943), (1946), (1960) |
| 대표 문학 | (1938), (1939), (1943), (1944), (1945), (1964) |
| 핵심 개념 | 즉자존재, 대자존재, 대타존재 |
| 활동 | (Les Temps modernes) 창간·편집장(1945), 러셀 법정 의장(1967), 5월 혁명 참여(1968) |
| 노벨상 | 1964년 문학상 수상자 선정, 본인이 거절 |
장폴 사르트르는 어떤 사람인가요
장폴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입니다. 철학서와 소설, 희곡을 동시에 써낸 드문 인물로, <존재와 무>(1943) 같은 이론서와 <구토>(1938) 같은 소설이 같은 문제의식을 다른 형식으로 다룹니다.
사르트르는 철학자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1945년 연간잡지 <현대>(Les Temps modernes)를 창간해 편집장을 지냈고, 이 잡지는 국제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프랑스 잡지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1967년에는 베트남 전쟁을 심판하는 지식인 법정인 러셀 법정에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의장으로 참여했고, 1968년 5월 혁명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어요(위키백과).
1980년 4월 15일 파리 브루세 병원에서 요독증에 따른 폐수종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흘 뒤인 4월 19일 장례식에는 5만 명이 모였고,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 20구에 안장되었습니다. 1986년 세상을 떠난 시몬 드 보부아르가 그 옆에 묻혔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성장기가 왜 자주 언급되나요
사르트르의 아버지 장바티스트 사르트르는 사르트르가 태어난 지 15개월 만인 1906년 9월에 사망했고, 그래서 사르트르는 아버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파리 이공과대학 1895학번 출신의 프랑스 해군 장교였습니다.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한 사람은 외할아버지 샤를 슈바이처(1844~1935)였습니다. 소르본 대학교 독문학 교수였던 그는 사르트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열 살까지 직접 가르쳤어요. 참고로 샤를 슈바이처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백부입니다. 사르트르의 어머니와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사촌이니, 사르트르와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오촌 사이가 됩니다.
사르트르가 태어난 곳은 파리 16구 미냐르로 13번지의 외조부 집이었고, 부르주아 가문의 외동아들이었습니다. 훗날 그가 문단과 제도가 주는 영예를 잇달아 거절한 이력을 두고 이 성장 배경이 함께 거론되곤 합니다.
사르트르는 어떻게 철학자가 되었나요
장폴 사르트르는 리세 앙리 4세와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거치며 철학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리세 앙리 4세 시절 훗날 작가가 되는 폴 니장을 만났고, 이 우정은 1940년 니장이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1924년 나란히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 합격했고, 1927년에는 함께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 총론」 프랑스어 번역본 교정에 참여했어요.
교원 자격 시험 이력은 극적입니다. 1928년 아그레가시옹(1급 교원자격) 철학시험에 낙제했지만, 이듬해인 1929년 재응시해 수석으로 합격했습니다. 니장도 같은 해 합격했고, 그해 차석이 시몬 드 보부아르였습니다. 사르트르는 이를 계기로 보부아르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했습니다(위키백과).
결정적인 전환은 1932년에 왔습니다. 레몽 아롱으로부터 후설의 현상학을 처음 전해 들은 사르트르는 이듬해 프랑스 문화원 장학생으로 베를린에 유학해 현상학을 연구했습니다. 그 전까지 그는 졸업 후 군에 입대해 기상관측병으로 18개월을 복무했고, 제대 후 1931년부터 파리 근교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어요.
즉자존재와 대자존재는 무슨 뜻인가요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존재를 즉자존재(être en-soi), 대자존재(être pour-soi), 대타존재(être pour autrui)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이 세 갈래가 <존재와 무>의 뼈대입니다.
말 그대로 옮기면 즉자존재는 '자기 안에 있는 존재', 대자존재는 '자기를 향한 존재', 대타존재는 '타인을 향한 존재'입니다. 돌멩이처럼 그냥 그것으로 있는 것과, 자기 자신을 의식하며 자기와 거리를 두는 것, 그리고 타인의 시선 속에 놓이는 것이 각각 다른 존재 방식이라는 구분이에요.
사르트르가 1943년 <존재와 무>를 출간하며 철학자로서의 지위를 굳혔다는 평가는 이 작업의 무게를 보여줍니다. 다만 이 세 구분의 세부 논증은 여기 정리한 근거 자료가 담고 있는 범위를 넘어서므로, 더 깊이 들어가려면 <존재와 무> 본문을 직접 확인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사르트르의 대표 저작에는 무엇이 있나요
장폴 사르트르의 주요 철학서는 <존재와 무>(1943),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년 발표, 1945년 강연 기반), <변증법적 이성 비판>(1960) 세 권입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1945년 강연을 바탕으로 이듬해 발표된 책이에요.
문학 쪽 목록도 두껍습니다. 소설로 <구토>(1938), <벽>(1939), <자유의 길>(1945)이 있고, 희곡으로 <파리떼>(1943), <닫힌 방>(1944)이 있습니다. 1936년 단편 <벽>을 완성했고 1938년 <구토>를 출판하면서 문학계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1964년에는 자서전 <말>(Les Mots)을 발표했습니다. 말년에는 플로베르 평전 <집안의 천치> 1, 2권을 1971년과 1972년에 걸쳐 출판했지만, 1973년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문학 저술을 중단했습니다.
왜 노벨 문학상을 거절했나요
사르트르는 1964년 10월 22일 스웨덴 아카데미가 노벨 문학상 수여를 발표하자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유로 알려진 말은 이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살아있는 동안 신성시되길 원치 않는다"(위키백과).
발표 당일 AFP 기자 프랑수아 드 클로세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거절하고 당신은 그것에 관하여 쓸 수 있다." 이틀 뒤 사르트르가 스웨덴 아카데미에 보낸 공개서한이 <르 몽드>와 <르 피가로>에 게재되었습니다.
거절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사르트르는 1945년에도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콜레주 드 프랑스 정교수직을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국가가 주는 훈장, 학계 최고 자리, 문학계 최고 상을 차례로 물린 셈이에요.
전쟁과 정치에서 사르트르는 무엇을 했나요
장폴 사르트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가 1941년 가짜 신체장애 증명서로 석방되었고, 파리로 돌아와 메를로퐁티 등과 대독 저항운동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전후에는 정당 정치와 거리를 두면서도 계속 개입했습니다. 1948년 3월 제3의 정치세력을 만들려고 민주혁명연합 준비위원회를 결성했지만, 내부 분열로 1949년 11월 해산되었습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 이후에는 권위주의를 비판하며 프랑스 공산당 지지를 철회했고, 1960년대부터는 마오주의 파벌을 지지하다가 나중에는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묘사했습니다.
1968년 5월 혁명 때 사르트르가 <르 몽드>에 실은 논단은 그의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세계의 학생 운동과 함께 우리가 여기서 표명한 연대는 [...] 모든 정치 체제와 조직(몇 예외를 제외하고)의 기만에 대한 첫 응답이다. 모든 언론기관(거의 예외 없이)은 몇 달간 이 운동을 왜곡하고 그 의미를 변질시키고자, 혹은 조롱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1968년 5월 1일 <르 몽드> 논단, 위키백과).
사르트르에게 논쟁적인 이력이 있나요
사르트르에게는 오늘날 심각하게 문제 삼는 이력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1993년 비앙카 랑블랭은 회고록에서, 리세 몰리에르 재학 중 교사였던 보부아르에게 먼저 성적 착취를 당했고 이후 보부아르가 자신을 사르트르에게 소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1977년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프랑스 성교 동의 연령 관련법 개혁을 요구하는 청원서에 서명했습니다. 이 청원에는 성인과 미성년 사이 성관계 합법화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위키백과).
사르트르는 대중적으로 '20세기 참여 지식인'의 상징으로만 알려지는 경우가 많지만, 그 상은 위의 이력을 빼놓고 그린 것입니다. 참여 지식인이라는 평가와 이 기록은 같은 사람의 것이고, 둘 중 하나만 말하는 소개는 불완전합니다.
사르트르에게 유명한 일화가 있나요
1935년의 메스칼린 실험이 사르트르의 일화 가운데 자주 회자됩니다. 의사 친구 라갓슈에게 메스칼린 주사를 맞는 실험을 했다가, 게와 낙지가 온몸을 감싸는 환각을 겪었어요.
후유증은 짧지 않았습니다. 이후 반년간 우울증을 앓았고, 갑각류에 대한 공포는 평생 지속되었습니다.
1964년에는 아를레트 엘카임을 입양했습니다. 계약 결혼이라는 관계 형식과 함께, 통상적인 가족 제도와 다른 방식으로 자기 삶을 구성하려 한 흔적으로 언급되는 대목입니다.
흔히 오해하는 것들
통념: 사르트르는 196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실제: 사르트르는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수상을 거절했습니다. '선정'과 '수상'이 갈리는 대목이라 특히 오인하기 쉬워요. 10월 22일 발표 이틀 뒤 그가 스웨덴 아카데미에 보낸 공개서한이 <르 몽드>와 <르 피가로>에 실렸습니다.
통념: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넣을 수는 없다"는 사르트르의 말이다.
실제: 이 말은 사르트르의 발언이 아닙니다. 1968년 5월 혁명 당시 사르트르 체포를 만류하며 드골 대통령이 했다고 전해지는 말입니다.
통념: 사르트르의 아버지가 무엇으로 사망했는지는 확정되어 있다.
실제: 근거 자료 안에서도 아버지의 사망 원인이 '황열'과 '인도차이나 전쟁 후유증인 열병' 두 가지로 서로 다르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원문 자체에 불일치가 있으니 어느 한쪽을 확정 사실로 옮기지 않는 편이 안전합니다. 다만 사망 시점이 1906년 9월이라는 점은 자료가 일관되게 밝히고 있어요.
통념: 사르트르는 만 75세에 세상을 떠났다.
실제: 1905년 6월 출생, 1980년 4월 사망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만 74세입니다. 일부 자료가 '만 75세에 임박한 나이'로 적고 있어 혼동이 생기는데, 실제 계산과는 어긋나는 표현입니다.
통념: 사르트르는 일관된 좌파 정치 노선을 지켰다.
실제: 사르트르의 정치적 입장은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 이후 프랑스 공산당 지지를 철회했고, 1960년대부터는 마오주의 파벌을 지지했으며, 나중에는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묘사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사르트르는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나요?
장폴 사르트르는 1905년 6월 21일에 태어나 1980년 4월 15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 장소는 파리 브루세 병원이었고, 사인은 요독증에 따른 폐수종이었습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어떤 관계였나요?
1929년 아그레가시옹 철학시험에서 사르트르가 수석, 시몬 드 보부아르가 차석으로 합격했고, 이를 계기로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했습니다. 1986년 사망한 보부아르는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 20구에 있는 사르트르의 무덤 옆에 묻혔습니다.
<존재와 무>는 언제 나온 책인가요?
<존재와 무>는 1943년에 출간되었고, 사르트르는 이 책으로 철학자로서의 지위를 굳혔습니다. 책에서 그는 존재를 즉자존재(être en-soi), 대자존재(être pour-soi), 대타존재(être pour autrui)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사르트르가 노벨상 말고 거절한 것이 또 있나요?
네. 사르트르는 1945년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콜레주 드 프랑스 정교수직을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1964년 노벨 문학상 거절은 세 번째 거절인 셈입니다.
사르트르가 만든 잡지가 있나요?
사르트르는 1945년 연간잡지 <현대>(Les Temps modernes)를 창간해 편집장을 지냈습니다. 이 잡지는 국제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프랑스 잡지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정리
장폴 사르트르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철학과 문학과 정치를 같은 손으로 다룬 사람'입니다. <존재와 무>의 이론적 구분과 <구토>의 소설적 형상화가 따로 놀지 않고, 대독 저항운동부터 러셀 법정과 5월 혁명까지 이어지는 개입도 책상 밖의 다른 활동이라기보다 같은 작업의 연장으로 놓여 있습니다.
거절의 이력은 그 태도를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콜레주 드 프랑스 정교수직, 노벨 문학상까지 차례로 물린 사람이 남긴 말은 "어떤 인간도 살아있는 동안 신성시되길 원치 않는다"였습니다.
동시에 사르트르를 소개할 때는 1993년 비앙카 랑블랭의 폭로와 1977년 청원 서명도 함께 놓아야 합니다. 참여 지식인의 상징이라는 상찬과 이 기록은 같은 인물의 이력이고, 어느 한쪽만 남기면 그 사람을 정확히 옮긴 게 아닙니다. 1980년 4월 19일 몽파르나스로 향하는 그의 관 뒤로 5만 명이 걸었고, 6년 뒤 보부아르가 그 옆자리에 묻혔습니다.
참고 자료
- 위키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