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다른 사람을 자꾸 밀어내는 시대, 한병철이 말한 에로스의 종말과 타자의 소멸

메뉴판 넘기듯 사람을 고르는 시대
요즘은 식당 메뉴판을 넘기듯 사람도 화면으로 넘기며 고르곤 해요. 사진을 보고 마음에 안 들면 옆으로 휙 넘기고, 조건이 맞으면 잠깐 멈추죠. 얼핏 보면 좋은 일 같아요. 손가락만 몇 번 움직이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늘었으니까요. 사랑할 기회가 그만큼 많아진 것처럼 느껴져요.
그런데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한병철은 정반대로 봐요. 이렇게 고르고 또 고를수록 진짜 사랑은 오히려 사라지고 있다고요. 그는 이걸 '에로스의 종말'이라고 불렀어요. 에로스는 그리스 말로 사랑이라는 뜻이에요. 사랑이 끝나간다니, 좀 이상하죠? 왜 그런지 천천히 풀어 볼게요.

타자가 도대체 뭐길래
먼저 '타자'라는 말부터 볼게요. 한자로 다를 타에 사람 자, 그러니까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그냥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아무리 애써도 다 알 수 없고,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가끔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사람이에요.
이걸 두 가지 장면으로 그려 볼게요. 하나는 거울이에요. 거울 앞에 서면 거기엔 나만 있어요. 내가 웃으면 따라 웃고, 손을 들면 똑같이 들죠. 편하지만, 거기엔 새로운 게 하나도 없어요.
다른 하나는 처음 가 보는 낯선 나라예요. 말도 다르고, 음식 냄새도 다르고, 길도 내가 예상한 대로 나 있지 않아요. 조금 불편하지만, 그래서 가슴이 뛰죠. 한병철이 말하는 타자는 바로 이 낯선 나라 같은 사람이에요.

우리는 점점 거울만 보고 있어요
한병철은 오늘날 우리가 타자를 점점 견디지 못하게 됐다고 말해요. 낯선 나라보다 거울을 더 좋아하게 됐다는 거예요.
사람을 고를 때를 떠올려 봐요. 우리는 나와 취향이 맞는 사람,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사람,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을 찾아요. 마치 입맛에 맞는 상품을 장바구니에 담듯이요. 나와 다른 부분, 낯설고 예측이 안 되는 부분은 '안 맞아'라며 지워 버리고요.
그렇게 다름을 자꾸 깎아 내면, 결국 내 앞에 남는 사람은 또 다른 내 모습이 돼요. 모두가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거죠. 한병철은 이렇게 모든 게 '나와 같은 것'으로만 채워지는 상태를 위험하다고 봤어요. 나에게만 푹 빠져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하는 마음, 이걸 '나르시시즘'이라고 불러요. 물에 비친 자기 얼굴에 반해 버린 신화 속 인물 이름에서 온 말이에요.

사랑은 원래 길을 잃는 일이에요
그런데 진짜 사랑은 거울로는 안 돼요. 사랑은 낯선 나라로 들어가는 일이거든요.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면 내 계획대로 안 되는 일이 생겨요.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수 없어서 마음을 졸이기도 하고, 나와 너무 달라서 부딪히기도 해요. 때로는 아프고, 기다려야 하고, 내가 변하기도 하죠. 한병철은 이렇게 아프고 불편한 부분을 '부정성'이라고 불러요. 사랑에는 이 부정성이 꼭 들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점점 아픈 것, 기다리는 것, 모르는 것을 싫어하게 됐어요. 손가락 한 번에 '좋아요'를 누르듯, 쉽고 매끄럽고 기분 좋은 것만 원하죠. 한병철은 말해요. 그렇게 불편함을 다 빼 버리면 사랑처럼 보이는 것만 남고, 진짜 사랑은 빠져나간다고요. 길을 잃을 각오 없이는 낯선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피로사회를 쓴 철학자가 사랑을 말한 까닭
한병철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독일로 건너가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에요. 그는 얇지만 날카로운 책들로 유명해졌어요.
그중 '피로사회'에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를 끝없이 몰아붙이며 지쳐 가는 우리 모습을 그렸어요. 더 잘해야 한다는 성과의 압박이 우리를 스스로 채찍질하게 만든다는 거죠. '투명사회'에서는 모든 걸 다 보여 주고 다 드러내려는 디지털 세상을 비판했어요.
'에로스의 종말'도 사실 같은 이야기예요. 나에게만 빠져 있고, 모든 걸 내 뜻대로 훤히 알고 싶어 하고, 불편한 건 다 지워 버리는 사회에서는, 나와 다른 타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요. 타자가 사라지면 사랑도 함께 사라진다는 게 그의 생각이에요.

정리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은 우리가 사랑을 못 하게 됐다고 혼내는 글이 아니에요. 나와 똑같은 것만 찾고, 불편한 건 다 지우다 보면, 내 앞엔 거울만 남고 낯선 나라 같은 타자는 사라진다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그 타자가 사라진 자리에서는 진짜 사랑도 설 곳을 잃는다는 거죠. 다음에 누군가를 만날 때, 나와 다른 그 낯선 부분이 불편함이 아니라 사랑이 시작되는 문일 수도 있다고 한 번쯤 떠올려 보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