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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글자들이 줄을 맞춰 서서 네모난 미로 한 장을 이루고 있다고 해볼게요. 그 길을 손가락으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한 편의 시가 읽혀요. 더 신기한 건 시작하는 글자와 끝나는 글자가 한가운데에서 딱 만난다는 점이에요. 출발한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둘레길 같지요. 이 독특한 시 그림을 천삼백여 년 전에 만든 사람이 신라 스님 의상이에요. 오늘은 이 사람과, 그가 그림으로 풀어낸 생각을 함께 들여다볼게요.

의상은 625년부터 702년까지 살았던 신라의 스님이에요. 스무 살 무렵 출가해서, 더 깊은 공부를 하려고 바다 건너 당나라로 떠났어요. 지금으로 치면 유학을 간 거예요. 그 길을 친구인 원효와 함께 나섰는데, 들어 보면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가던 중 어두운 밤, 두 사람은 어느 동굴에서 잠을 잤어요. 목이 말랐던 원효가 곁에 있던 물을 시원하게 들이켰는데, 아침에 보니 그건 해골에 고인 물이었어요. 같은 물인데 모르고 마셨을 땐 달았고 알고 나선 속이 뒤집혔지요. 원효는 '모든 건 마음이 짓는 일'이라며 깨닫고 신라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의상은 마음을 바꾸지 않고, 혼자 배에 올라 당나라로 건너갔어요. 끝까지 직접 배워 보고 싶었던 거예요.

당나라에서 의상은 지엄이라는 큰 스승 밑에서 화엄이라는 가르침을 깊이 익혔어요. 이때 전해지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의상을 좋아하게 된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스님인 그가 마음을 받지 않자 '그렇다면 평생 당신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대요.
공부를 마친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는 배에 오르자,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어 그 배를 지켰다고 해요. 훗날 의상이 676년에 절을 지으려 하니 이미 그 자리를 차지한 무리가 비켜 주지 않았어요. 그때 선묘가 커다란 바위로 변해 공중에 둥실 떠올라 그들을 놀라게 했고, 덕분에 절을 세울 수 있었대요. 그 절이 지금도 경상북도에 남아 있는 부석사예요. 부석은 '떠 있는 돌'이라는 뜻이에요. 물론 이건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온 이야기지만, 그만큼 의상이 귀하게 기억됐다는 표시이기도 해요.

의상이 평생 붙든 가르침인 '화엄'은 한마디로 이렇게 말해요. 세상 모든 것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그물처럼 이어져 있다고요.
커다란 그물 하나를 떠올려 볼게요. 그물코마다 작은 구슬이 하나씩 달려 있어요. 그런데 이 구슬들이 어찌나 맑은지, 구슬 하나에 다른 모든 구슬이 비쳐 보여요. 그 비친 구슬 속에는 또 나머지 전부가 비치고요. 그러니 구슬 하나만 들여다봐도 그 안에 온 세상이 들어 있는 셈이에요. 화엄은 세상을 이런 그물로 봐요. 나 하나가 보잘것없어 보여도 그 안에 전체가 담겨 있고, 전체는 또 나 하나하나로 이뤄진다는 거예요. 하나가 전부고 전부가 하나라는 말이 여기서 나와요.

이 큰 생각을 의상은 짧은 그림 한 장에 담았어요. 그게 바로 그가 직접 지은 화엄일승법계도예요. 이름이 길지만 풀면 '화엄의 가르침으로 세상 전체를 그린 그림' 정도예요.
글자는 모두 이백열 개예요. 일곱 글자씩 서른 줄, 딱 그만큼이에요. 이 글자들을 한 줄로 죽 늘어놓지 않고, 네모난 도장 모양으로 요리조리 꺾어서 미로처럼 접어 놨어요. 길이 쉰네 번 굽이치도록요. 그래서 가운데 한 글자에서 출발해 미로를 따라가다 보면 다시 가운데로 돌아와 끝나요. 시작과 끝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거예요.
왜 굳이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화엄의 핵심이 바로 '하나로 돌아온다'는 거니까요. 멀리 돌고 돌아도 결국 한 곳에서 만난다는 생각을, 말로 길게 설명하는 대신 눈에 보이는 길 모양으로 그려 보인 거예요. 어려운 가르침을 그림 한 장으로 쥐여 준 셈이지요.

의상은 당나라에서 배운 화엄을 신라에 들여와, 부석사를 중심으로 제자를 기르며 가르침을 폈어요. 그래서 그를 한국 화엄종을 처음 연 사람이라고 불러요. 화엄종은 앞서 말한 '모든 것이 이어져 있다'는 가르침을 따르는 큰 흐름이에요.
그가 대단한 건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두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두꺼운 경전에 담긴 생각을 이백열 글자로 줄이고, 그마저 누구나 손으로 따라 그릴 수 있는 길 모양으로 바꿔 놨어요. 정말 잘 이해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의상은 신라 때 당나라로 건너가 화엄을 배워 온 스님이에요. 화엄은 세상 모든 것이 그물코처럼 이어져, 하나 안에 전부가 담겨 있다고 보는 생각이고요. 의상은 이 큰 생각을 이백열 글자짜리 미로 같은 그림인 화엄일승법계도에 담아, 시작과 끝이 한자리에서 만나게 했어요. 그리고 부석사를 중심으로 제자를 길러 한국 화엄종을 열었지요. 어려운 가르침을 그림 한 장으로 쥐여 준 사람, 그렇게 의상을 기억하면 좋겠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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