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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프로이센 뢰켄에서 태어나 1900년 바이마르에서 세상을 떠난 독일 철학자이자 고전문헌학자입니다. 니체는 유럽의 세속화를 두고 신이 죽었다고 진단한 뒤, 그 빈자리에 위버멘쉬와 영원회귀, 그리고 주어진 의미를 찾는 대신 스스로 가치를 만드는 태도를 놓았습니다. 니체의 유고는 사후 여동생 엘리자베트의 편집을 거치며 크게 왜곡됐고, 그 왜곡을 걷어내는 일이 20세기 니체 연구의 큰 과제가 됐습니다.
| 항목 | 내용 |
|---|---|
| 생몰 | 1844년 10월 15일 프로이센 작센주 뢰켄 출생,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 사망 |
| 활동 시기와 장소 | 1869년부터 1879년까지 스위스 바젤 대학교 고전문헌학 교수, 사임 후에는 스위스와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를 오가며 독립 저술가로 생활 |
| 국적 | 바젤대 부임 전 프로이센 시민권을 포기해 1869년 4월 17일 공식 철회, 이후 평생 공식적으로 무국적자 |
| 대표 저작 | 비극의 탄생(1872), 반시대적 고찰(18731876),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 아침놀(1881), 즐거운 학문(188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 선악의 저편(1886), 도덕의 계보(1887), 우상의 황혼(1888년 집필, 1889년 출간) |
| 핵심 개념 | 신은 죽었다, 영원회귀, 아모르 파티(운명애), 위버멘쉬와 인간말종, 주인도덕과 노예도덕, 원한(ressentiment), 능동적 허무주의와 수동적 허무주의, 아폴론적과 디오니소스적 |
| 1차 자료 문제 | 《힘에의 의지》(1901)는 니체가 완성한 책이 아니라 여동생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가 미출간 노트를 편집하고 재구성해 펴낸 것. 니체 유고 편집자 마치노 몬티나리는 이를 위작(forgery)이라 불렀음 |
| 말년 | 1889년 1월 3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정신적 붕괴, 이후 죽을 때까지 11년간 정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생활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직업으로 출발한 자리는 고전문헌학이었습니다. 니체는 1869년 스물네 살에 스위스 바젤 대학교 고전문헌학 교수로 임명됐는데, 박사학위도 교수자격시험(하빌리타치온)도 없이 정교수가 된, 기록에 남은 가장 젊은 고전학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영어 위키백과).
니체가 철학 쪽으로 기울어진 계기는 1865년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은 일이었습니다. 같은 해 6월, 스무 살의 니체가 여동생 엘리자베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어요. “Hence the ways of men part: if you wish to strive for peace of soul and pleasure, then believe; if you wish to be a devotee of truth, then inquire….” 마음의 평화를 원하면 믿고, 진리를 따르려면 캐물으라는 뜻이고, 니체가 평생 택한 쪽은 뒤쪽이었습니다.
니체의 몸은 일찍부터 그를 배신했습니다. 1870년에서 1871년 사이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에 위생병으로 복무하면서 디프테리아와 이질에 걸렸고, 1879년에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바젤 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합니다. 그 뒤로 니체는 대학도 국적도 없이 스위스와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를 옮겨 다니며 글을 썼어요.
프리드리히 니체는 1879년 바젤 대학교를 떠난 뒤 소속 없는 독립 저술가로 살았고, 그 유랑기가 곧 대표작이 쏟아진 시기입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 이후 《아침놀》(1881), 《즐거운 학문》(188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 《선악의 저편》(1886), 《도덕의 계보》(1887)가 이 기간에 나왔습니다.
니체는 1882년 로마에서 루 살로메를 만나 세 차례 청혼했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그 뒤 정신적 고통 속에 라팔로로 떠났고, 거기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를 열흘 만에 써냈습니다 (영어 위키백과). 니체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어요.
1888년은 니체에게 마지막이자 가장 다작한 해였습니다.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니체 대 바그너》가 이 한 해에 집필됐고, 니체는 마흔네 번째 생일에 《우상의 황혼》과 《안티크리스트》를 막 끝낸 상태로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 서문의 첫 요구는 이랬습니다. “Hear me! For I am such and such a person. Above all, do not mistake me for someone else.” 자신을 다른 사람과 혼동하지 말라는 이 부탁은, 이후 니체에게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씁쓸하게 읽힙니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진술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 선언이라기보다, 유럽 문명에서 신이 더 이상 가치의 근거로 작동하지 않게 됐다는 진단입니다. 이 말은 《즐거운 학문》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 등장하며, 과학의 발전과 유럽의 세속화가 은유적으로 아브라함의 신을 죽였다는 의미로 제시됩니다 (영어 위키백과).
니체가 문제 삼은 것은 신이 사라진 뒤에도 사람들이 신에게서 나온 도덕과 의미를 그대로 쓰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니체는 기독교를 별개의 진리 체계로 보지 않고 플라톤주의의 대중판으로 취급했어요. “denn Christenthum ist Platonismus für's „Volk‟”, 곧 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톤 사상에 불과하다는 문장이 그 태도를 압축합니다 (위키백과).
근거가 사라졌는데 습관만 남은 상태를 니체는 허무주의라고 불렀고, 유고에서 이를 두 갈래로 나눴습니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쇼펜하우어식 염세주의처럼 의미를 잃었다는 감각에 사로잡힌 상태이고, 능동적 허무주의는 주어진 의미를 찾는 대신 스스로 가치를 만들려는 태도입니다. 니체가 권한 쪽은 당연히 뒤쪽이에요.
영원회귀는 지금 이 삶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채 무한히 되풀이된다는 생각이고, 니체는 이것을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 불렀습니다. 이 사상은 《즐거운 학문》 341절에 우화 형태로 처음 제시됐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장에도 나옵니다 (영어 위키백과).
영원회귀는 종교적 환생과 다릅니다. 니체는 이를 초자연적 재탄생이 아니라 동일한 육체로 돌아오는 순수하게 물리적인 개념으로 제시했어요. 다음 생에 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몸으로 이 삶을 그대로 다시 사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영원회귀는 사실 판단이기 전에 시험대에 가깝습니다. 이 되풀이를 견디는 정도가 아니라 기꺼이 긍정하려면 아모르 파티, 곧 운명애가 필요하다고 니체는 말했습니다. 후회하는 일 하나 없이 통째로 다시 받겠느냐는 물음 앞에서 지금 사는 방식이 드러난다는 뜻이에요.
위버멘쉬(Übermensch)는 초능력을 가진 우월한 인간이 아니라, 지금의 인간을 넘어서야 할 것으로 보는 방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개념은 니체의 저작 가운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만 등장하며, 인간말종(der letzte Mensch)과 짝을 이루어 제시됩니다 (영어 위키백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의 선언은 이렇습니다. “I teach you the Übermensch. Man is something that shall be overcome… The Übermensch is the meaning of the earth.” 위버멘쉬가 대지의 의미라는 말은, 하늘 너머 저편에 의미를 두는 태도를 겨냥한 것으로 읽힙니다.
위버멘쉬 개념은 나중에 나치가 문자 그대로의 인종적 우월성으로 왜곡해 가져다 썼습니다. 이것은 니체 본인의 비유적 표현(figurative form of speech)을 문자화한 왜곡입니다.
니체의 도덕 계보학은 좋음과 나쁨을 가르던 주인도덕이 선과 악을 가르는 노예도덕으로 뒤집히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주인도덕에서 좋음은 행복과 부, 힘, 건강과 같은 것이고 나쁨은 노예처럼 가난하고 약하고 병든 상태와 같은 것으로 놓입니다 (영어 위키백과).
노예도덕은 여기에 원한(ressentiment)에서 출발해 가치를 역전시킵니다. 강하고 건강한 쪽을 악으로 규정하고, 약하고 가난한 쪽을 선으로 세우는 방식입니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1887)에서 하려던 일은 어느 쪽이 옳은지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연해 보이는 선악 구분이 언제 어떤 힘에서 생겨났는지 계보를 캐는 것이었어요.
한 가지 짚어둘 것이 있습니다. 니체가 이 책에서 유대교를 비판할 때 겨냥한 대상은 당대 유대인이 아니라 고대 유대 사제 계층이며, 니체는 같은 책에서 반유대주의를 명시적으로 규탄했습니다.
아폴론적과 디오니소스적은 니체가 《비극의 탄생》(1872) 1장과 2장에서 두 가지 예술충동(Kunsttriebe)으로 처음 도입한 짝 개념입니다. 아폴론은 회화나 조각, 서사시처럼 형태를 빚어 보여주는 조형적이고 표상적인 예술과 연결되고, 디오니소스는 음악과 서정시처럼 형태로 옮기지 않고 직접 터져 나오는 비표상적이고 표현적인 예술과 연결됩니다 (스탠퍼드 철학백과).
니체가 이 짝을 꺼낸 배경에는 그리스인이 마주한 실레노스의 지혜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실된 대화편 단편(F 44 R3)에 전해지고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211행에도 암시된 이 말은 《비극의 탄생》 3장에 이렇게 인용됩니다. “the best of all things for you is entirely unattainable: never to have been born, not to be, to be nothing. But the second best is for you—to die soon.”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 일찍 죽는 것이 차선이라는 말이에요.
《비극의 탄생》 5장의 유명한 문장, “only as an aesthetic phenomenon is existence and the world eternally justified”는 그 지혜에 대한 니체의 응답으로 읽힙니다. 존재가 정당화되는 길이 도덕이나 종교가 아니라 미적 현상 쪽에 있다는 뜻이지요.
이 책은 발표 당시 고전학계에서 냉담한 반응을 받았습니다. 니체의 스승 격이었던 리츨도 미지근했고, 울리히 폰 빌라모비츠묄렌도르프는 《미래의 문헌학》이라는 논박문으로 이 책의 평판을 깎아내렸습니다.
니체와 리하르트 바그너는 1868년에 처음 만나 1869년부터 1876년경까지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니체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기획에도 관여했습니다. 그러다 1876년 바이로이트 축제 공연에 실망하면서 두 사람은 점차 멀어졌어요 (영어 위키백과, 스탠퍼드 철학백과).
결별은 조용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니체는 1888년 한 해에만 《바그너의 경우》와 《니체 대 바그너》 두 권을 바그너 비판에 할애했습니다. 한때 가장 가까웠던 사람에게 마지막 해의 저술 절반가량을 쏟은 셈이에요.
니체는 1889년 1월 3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정신적 붕괴를 겪었고, 그 뒤 죽을 때까지 11년간 정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이후에는 여동생 엘리자베트가 그를 돌봤습니다 (영어 위키백과, 위키백과).
붕괴 직후 니체는 코지마 바그너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등에게 짧은 편지들을 보냈습니다. 광기의 쪽지(Wahnzettel, Wahnbriefe)라 불리는 이 글들에서 니체는 자신을 디오니소스, 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der Gekreuzigte)로 서명했어요. 부르크하르트에게 보낸 쪽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I have had Caiaphas put in fetters. Also, last year I was crucified by the German doctors in a very drawn-out manner. Wilhelm, Bismarck, and all anti-Semites abolished.”
니체는 1898년과 1899년에 최소 두 차례 뇌졸중을 겪어 부분 마비 상태가 됐고, 1900년 8월 중순 폐렴에 걸린 뒤 8월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밤에 또 한 번 뇌졸중을 겪고 이튿날 정오 무렵 숨졌습니다. 장례식에서 비서 페터 가스트는 “Holy be your name to all future generations!”라는 조사를 읽었습니다.
니체가 파시즘과 나치즘에 연결된 것은 본인의 사상 때문이 아니라 여동생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의 편집 때문입니다. 엘리자베트는 니체 사후 미출간 원고의 관리자이자 편집자가 되어 자신의 독일 초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맞게 원고를 손질했고, 그 결과물이 니체의 이름으로 유통됐습니다 (영어 위키백과, 위키백과).
정작 니체 본인은 반유대주의를 여러 차례 명시적으로 거부했습니다. 니체는 1886년 반유대주의적 견해에 혐오감을 느껴 출판업자 에른스트 슈마이츠너와 결별했고, 1887년 3월 29일 테오도어 프리치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반유대주의자들을 조롱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And finally, how do you think I feel when the name Zarathustra is mouthed by anti-Semites?”
20세기에 발터 카우프만과 R. J. 홀링데일, 조르주 바타유 같은 연구자들이 이 왜곡된 해석에 반박하면서 니체 읽기의 방향이 바로잡혔습니다. 한편 루돌프 슈타이너는 1895년 《시대에 맞서 싸운 투사, 프리드리히 니체》라는 옹호서를 썼고 이후 엘리자베트에게 고용되어 니체 철학을 가르치는 개인교사가 됐지만, 몇 달 만에 포기했습니다.
통념: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는 대작을 남겼다.
실제로 《힘에의 의지》는 니체가 쓴 통일된 저작이 아닙니다. 여동생 엘리자베트가 1901년에 미출간 노트를 자기 방식으로 편집하고 재구성해 펴낸 책이고, 학계는 이것이 니체의 참된 의도를 반영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니체 유고 편집자 마치노 몬티나리는 이를 위작(forgery)이라 불렀고, 니체 자신이 1888년 무렵 이 기획을 포기했다는 정황도 있습니다 (영어 위키백과).
통념: 니체는 토리노에서 채찍질당하는 말을 끌어안고 쓰러졌다.
실제로 이 유명한 일화는 니체 사후에 널리 퍼진 이야기일 뿐, 그날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통념: 니체의 정신착란 원인은 매독이다.
실제로 매독설은 오랜 통설이었지만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조울증형 정신병과 혈관성 치매의 결합, 뇌수막종, 유전성 뇌졸중 질환인 카다실(CADASIL), 매독 치료에 쓰이던 수은 중독 등 여러 대안 가설이 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돼 왔습니다.
통념: 니체는 나치와 사상적으로 통한다.
실제로 니체는 반유대주의와 국가주의를 명시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나치와의 연관은 여동생이 유고를 자신의 독일 초국가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맞게 편집하고 왜곡한 결과입니다. 위버멘쉬를 인종적 우월성으로 읽는 것도 비유를 문자로 바꾼 왜곡이고요.
통념: 니체는 자신이 폴란드 귀족 혈통이라고 했으니 그렇다.
실제로 니체의 이 주장은 학계 대다수가 순전한 발명으로 간주하는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니체의 조상은 독일계 루터교 성직자 집안으로 확인되며, 니체 서한 편집자 콜리와 몬티나리도 이를 잘못된 믿음이자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평했습니다.
통념: 니체는 성적이 뛰어나 슐포르타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실제로 니체의 성적은 반 상위권이 아니었고, 장학금은 아버지가 목사로서 국가를 위해 일했다는 이유로 주어졌습니다.
통념: 《비극의 탄생》은 쇼펜하우어 형이상학을 그대로 받아들인 책이다.
실제로 이 형이상학적 해석은 오랜 정설이었지만 최근 학계는 이를 거부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이 책 18절에서 니체가 형이상학적 위안을 하나의 환상이라 지칭한 대목 등이 근거이고, 해석은 지금도 갈립니다. 이 책이 쇼펜하우어식 염세주의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지 거부하는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니체 자신의 1888년 회고인 《이 사람을 보라》는 그리스인이 염세주의를 극복했다는 낙관적 독해를 지지하지만, 본문 10장과 24장 등은 비관적 독해도 뒷받침합니다 (스탠퍼드 철학백과).
통념: 니체가 동성애자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실제로 요아힘 쾰러의 이 해석은 니체 연구자들 사이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앨런 메길 등은 증거가 매우 약하다고 지적하며, 쾰러가 19세기의 우정 개념에 20세기적 성 정체성 이해를 투영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니체는 언제 어디서 태어나고 죽었나요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프로이센 작센주 뢰켄에서 태어나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사망했습니다. 사망 직전인 8월 중순 폐렴에 걸렸고, 8월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밤에 뇌졸중을 겪은 뒤 이튿날 정오 무렵 숨졌습니다.
니체의 국적은 무엇인가요
니체는 바젤 대학교 부임을 앞두고 프로이센 시민권을 포기했고, 공식 철회 날짜는 1869년 4월 17일입니다. 그 뒤 니체는 여생을 공식적으로 무국적자로 지냈습니다.
니체의 대표작은 무엇인가요
니체의 대표작으로는 《비극의 탄생》(1872), 《즐거운 학문》(188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 《선악의 저편》(1886), 《도덕의 계보》(1887)가 꼽힙니다. 《우상의 황혼》은 1888년에 쓰여 1889년에, 《안티크리스트》는 1888년에 쓰여 1895년에, 《이 사람을 보라》는 1888년에 쓰여 1908년에 출간됐습니다.
영원회귀와 아모르 파티는 어떻게 이어지나요
영원회귀는 같은 삶이 동일한 육체로 무한히 되풀이된다는 순수하게 물리적인 개념이고, 니체는 이를 가장 무거운 짐이라 불렀습니다. 이 되풀이를 긍정하려면 운명을 사랑하는 태도인 아모르 파티가 필요하다고 니체는 말했습니다.
위버멘쉬는 어느 책에 나오나요
위버멘쉬는 니체의 저작 가운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만 등장합니다. 반대편에는 인간말종(der letzte Mensch)이 놓여 있어요.
니체를 읽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할 것은 지금 손에 든 문장이 정말 니체가 출간한 문장인가 하는 점입니다. 니체는 1889년 1월 이후 11년을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살았고, 그 침묵 위에 여동생이 노트를 잘라 붙여 만든 책이 니체의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몬티나리가 그것을 위작이라 부른 이유입니다.
출간된 니체는 일관됩니다. 신이 가치의 근거이기를 그친 자리에서 남의 의미를 빌려오지 말고 스스로 만들라는 요구, 지금 이 삶을 그대로 다시 살겠느냐는 물음, 선과 악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 뒤집힌 것이라는 계보 추적. 반유대주의자가 차라투스트라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고 편지에 쓴 사람도 같은 니체입니다.
마흔넷의 니체는 자서전 서문에 자신을 다른 사람과 혼동하지 말아 달라고 적었습니다. 그 요구가 지켜지기까지 카우프만과 홀링데일, 바타유를 거쳐 반세기가 넘게 걸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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