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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카를 마르크스는 1818년 프로이센 트리어에서 태어나 1883년 런던에서 무국적자 신분으로 세상을 떠난 사회철학자입니다. 『자본론』에서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원리를 잉여가치와 상품물신성으로 분석했고,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정치와 문화라는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역사유물론을 내놓았습니다. 엥겔스와 함께 쓴 《공산당 선언》(1848)은 "The history of all hitherto existing society is the history of class struggles"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 항목 | 내용 |
|---|---|
| 생몰 | 1818년 5월 5일 프로이센 왕국 트리어 출생, 1883년 3월 14일 런던 사망(만 64세) |
| 주요 활동지 | 트리어, 본, 베를린, 쾰른, 파리, 브뤼셀, 그리고 1849년부터 죽을 때까지 런던 |
| 학위 | 1841년 4월 예나 대학교 철학박사, 논문 주제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 비교 |
| 생전 대표 저작 | 《공산당 선언》(1848),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 『자본론』 1권(1867), 『프랑스 내전』(1871), 『고타 강령 비판』(1875) |
| 사후 출간 | 『자본론』 2권(1885), 3권(1894), 『독일 이데올로기』(1932),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1939), 『잉여가치론』 완전판(1963년과 1971년 모스크바) |
| 핵심 개념 | 역사유물론, 토대와 상부구조, 잉여가치, 상품물신성, 유적존재(Gattungswesen), 프롤레타리아 독재 |
| 평생의 동료 | 프리드리히 엥겔스, 1844년 8월 28일 파리 카페 드 라 레장스에서 첫 만남 |
| 1차 자료 문제 | 한국어 위키백과 안에 사망일, 사망 나이, 『자본론』 2권 출간연도가 서로 어긋나는 대목이 있어 이 글은 영어 위키백과와 정합성 있는 쪽을 따랐습니다 |
카를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프로이센 왕국 트리어의 브뤼켄골목(Brückengasse) 664번지에서, 하인리히 마르크스와 헨리에테 프레스부르크의 셋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형 모리츠가 1819년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마르크스가 장남이 됐어요.
아버지 하인리히 집안은 1723년 이래 대대로 트리어의 랍비 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1815년 라인란트가 프로이센에 병합된 뒤 유대인 해방령이 폐지되자, 하인리히는 변호사직을 유지하려고 유대교에서 프로이센 복음교회로 개종했습니다(영어 위키백과). 종교적 정체성이 법과 생계 때문에 한 번 갈아엎인 집에서 마르크스가 자란 셈입니다.
어머니 헨리에테 프레스부르크는 네덜란드계 유대인 사업가 가문 출신인데, 여기서 뜻밖의 연결이 하나 나옵니다. 헨리에테의 여동생 조피 프레스부르크가 리온 필립스와 결혼했고, 그 후손이 전자회사 필립스를 창업했습니다. 훗날 마르크스 부부는 런던 망명 시절 이 리온 필립스에게 자주 돈을 빌렸습니다.
마르크스는 원래 철학과 문학을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강권으로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1835년 10월, 열여섯 살에 본 대학교에 입학했고, 성적이 떨어지자 아버지가 그를 베를린 대학교로 전학시켰어요.
결국 마르크스는 1841년 4월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논문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을 비교하는 내용이었고, 베를린 대학교의 보수적인 반발을 피하려고 더 진보적인 예나 대학교에 제출한 것이었습니다(영어 위키백과). 다만 이 논문의 연도는 자료마다 조금 다릅니다. 영어 위키백과 본문은 1841년 4월 학위 취득으로 적고 있지만, 한국어 위키백과의 저서 목록에는 같은 논문이 1842년작으로 표기돼 있어요.
1843년 6월 19일, 마르크스는 7년간의 약혼 끝에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크로이츠나흐의 개신교 교회에서 결혼했습니다.
마르크스는 1842년 쾰른에서 급진지 『라인신문』의 언론인으로 일했고, 이 신문은 1843년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폐간됐습니다. 폐간의 직접적인 계기는 러시아 군주제를 비판한 기사였고, 니콜라이 1세의 요청이 프로이센 정부를 움직였습니다.
검열에 대해 마르크스는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Our newspaper has to be presented to the police to be sniffed at, and if the police nose smells anything un-Christian or un-Prussian, the newspaper is not allowed to appear"(영어 위키백과). 신문이 경찰의 코앞에 놓여 냄새를 맡히는 물건이었다는 표현입니다.
신문이 문을 닫은 뒤 마르크스는 파리로 갔고, 1844년 8월 28일 카페 드 라 레장스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처음 만났습니다. 이 만남이 평생의 협력관계로 이어집니다. 1845년 4월 파리에서 브뤼셀로 옮긴 뒤에는 열한 개 명제로 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썼고, 여기서 그 유명한 제11명제가 나왔어요.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is to change it."
역사유물론은 사회의 정치와 문화가 그 사회의 경제적 생산 방식 위에 얹혀 있다고 보는 마르크스의 역사관입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양식'은 두 부분으로 이뤄집니다. 하나는 생산수단, 즉 토지와 자원과 기술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관계, 즉 사람들이 그 생산수단을 취득하고 사용하면서 맺는 사회적 관계입니다.
마르크스는 이 경제적 층위를 '토대'(하부구조)라고 부르고, 그 위에 얹힌 문화와 정치의 층위를 '상부구조'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상부구조가 토대에 의해 규정된다고 봤습니다(영어 위키백과). 어떤 시대의 법과 종교와 예술이 왜 하필 그런 모양인지를 묻는다면, 답을 그 시대가 무엇을 어떻게 생산했는지에서 찾자는 제안이에요.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은 이 관점을 한 줄로 압축합니다. "The history of all hitherto existing society is the history of class struggles."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로 번역돼 실려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잉여가치는 노동시장과 생산물시장 사이의 차이에서 생깁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노동자를 살아있게 하는 데 드는 비용과, 그 노동자가 실제로 만들어내는 가치 사이의 간격이에요.
두 값이 같다면 이윤이 생길 자리가 없습니다. 노동자를 먹이고 재우는 데 드는 비용보다 노동자가 만들어낸 것의 가치가 크기 때문에 그 차액이 남고,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을 바로 이 지점에서 설명했습니다(영어 위키백과).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 자체도 노동과 떼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을 노동의 함수로 존재하는 '유적존재'(독일어로 Gattungswesen)로 규정했어요(한국어 위키백과). 노동이 그저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인 방식이라면, 그 노동에서 남의 몫이 계속 빠져나가는 구조는 경제 문제인 동시에 인간에 관한 문제가 됩니다.
상품물신성은 사람이 만든 상품이 마치 스스로 생명과 운동력을 가진 것처럼 나타나고, 정작 인간과 그 행동이 상품에 종속되어 거기에 맞춰 적응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마르크스의 개념입니다.
순서가 뒤집힌 상태라고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원래는 사람이 물건을 만들고 부리는 쪽인데, 어느 순간 물건 쪽이 제 나름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사람이 그 법칙에 자기를 맞추게 된다는 겁니다(영어 위키백과).
마르크스가 이 개념으로 짚으려 한 것은 개인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구조의 외양입니다. 상품 관계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는 점이 가려진다는 뜻이에요.
『자본론』 제1권은 1867년에 출간됐고, 제2권과 제3권은 마르크스가 죽은 뒤 엥겔스의 편집으로 각각 1885년과 1894년 10월에 나왔습니다(영어 위키백과).
여기까지 오는 길은 길었습니다. 1857년까지 마르크스는 자본, 지대, 임노동, 국가, 세계시장을 다루는 800쪽 넘는 초고를 썼지만 생전에 출판하지 못했고, 이 원고는 1939년에야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그룬트리세)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1859년에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가 출간돼 초판이 빠르게 매진됐는데, 이 책이 훗날 세 권짜리 『자본론』의 예고편 격이었어요.
『자본론』은 국경 밖에서도 읽혔습니다. 러시아어판 제1권 3,000부가 1872년 3월 27일에 출간됐습니다.
생계는 따로 벌어야 했습니다. 마르크스는 1852년부터 1862년까지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특파원으로 일하며 주 수입원을 얻었는데, 1863년 이 신문의 논조가 남북전쟁에서 즉각적 평화를 지지하는 쪽으로 바뀌자 이에 반대해 기고를 중단했습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는 1843년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 나오는 긴 문단의 마지막 문장이고, 원래 맥락은 종교를 조롱하는 쪽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쪽입니다.
전문은 이렇습니다. "Religious suffering is, at one and the same time, the expression of real suffering and a protest against real suffering. Religion is the sigh of the oppressed creature, the heart of a heartless world, and the soul of soulless conditions. It is the opium of the people." 종교를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 심장 없는 세계의 심장, 영혼 없는 조건의 영혼이라고 부른 다음에 아편이라는 말이 옵니다.
학자 슐로모 아비네리(Shlomo Avineri)는 이 대목의 태도를 경멸이 아니라 공감("empathy, not scorn")으로 평가합니다(영어 위키백과). 마지막 한 문장만 떼어내면 원래 글이 하던 말과 반대편에 서게 되는 셈이에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놓인 이행기의 국가 형태를 가리켜 쓴 말입니다. 1875년 『고타 강령 비판』에서 명시적으로 등장합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between capitalist and communist society there lies the period of the revolutionary transformation of the one into the other. Corresponding to this is also a political transition period in which the state can be nothing but the revolutionary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영어 위키백과). 한 사회가 다른 사회로 바뀌는 시기가 있고, 그 시기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 말고 다른 것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고타 강령 비판』은 당내 논쟁 문서이기도 했습니다. 마르크스는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아우구스트 베벨이 페르디난트 라살의 국가사회주의와 타협하려는 경향을 비판했어요. 같은 글에 자주 인용되는 구절도 실려 있습니다. "From each according to his ability, to each according to his need."
실제 봉기에 대해서도 마르크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1871년 파리 시민들이 두 달간 도시를 점거한 파리 코뮌이 유혈 진압되자, 마르크스는 이를 옹호하는 팜플렛 『프랑스 내전』을 썼습니다. 조직 활동으로는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창립 총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돼, 미하일 바쿠닌 중심의 무정부주의 세력과 내부 투쟁을 벌였습니다.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 이후 프로이센에서 추방돼 1849년 8월 런던으로 옮겼고, 1883년 죽을 때까지 런던을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이 시기의 생활은 궁핍했습니다. 마르크스와 예니 사이에 태어난 일곱 자녀 가운데 성인까지 산 것은 딸 셋뿐이었어요. 예니 카롤린(1844~1883), 예니 라우라(1845~1911), 예니 엘레아노르(1855~1898)이고, 나머지 넷은 런던의 가난 속에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말년의 마르크스는 자기 이론을 유럽 바깥에도 적용해볼지 고민했습니다. 1881년 3월 8일 베라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러시아가 농촌공동체(미르)를 기반으로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고 곧장 공산주의로 갈 가능성을 검토했어요. 1867년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아일랜드 문제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I used to think the separation of Ireland from England impossible. I now think it inevitable. The English working class will never accomplish anything until it has got rid of Ireland."
마르크스는 1883년 3월 14일 오후 런던에서 기관지염과 흉막염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국적자 신분이었고, 만 64세였습니다. 장례식은 3월 17일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동편의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 구역에서 치러졌는데, 참석자는 아홉에서 열한 명 정도로 아주 작았습니다. 당시 신문들은 스물다섯에서 서른 명으로 보도했어요.
그 자리에서 엥겔스가 남긴 추도사는 이렇습니다. "On the 14th of March, at a quarter to three in the afternoon, the greatest living thinker ceased to think. He had been left alone for scarcely two minutes, and when we came back we found him in his armchair, peacefully gone to sleep – but forever"(영어 위키백과). 1954년 11월 마르크스 일가의 묘가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안 현재 위치로 옮겨졌고, 1956년 3월 14일 로런스 브래드쇼가 만든 흉상이 있는 새 묘비가 제막됐습니다. 묘비에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 "Workers of All Lands Unite"가 새겨져 있습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이를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옮기고 있어요.
통념: 마르크스가 변증법적 유물론을 세웠다. 실제로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틀은 마르크스 본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엥겔스와 레닌이 마르크스의 역사관(역사유물론)을 훗날 각색한 것입니다. 영어 위키백과는 이 각색 자체를 논쟁적(controversially adapted)이라고 명시합니다(영어 위키백과). 마르크스를 변증법적 유물론의 창시자로 단순화하지 않는 편이 정확합니다.
통념: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은 종교에 대한 냉소적 비난이다. 실제로는 1843년 원문 전체가 억압받는 자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담고 있고, 학자 슐로모 아비네리는 이를 경멸이 아닌 공감으로 평가합니다. 마지막 한 문장만 떼어 인용하면 원문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통념: 『독일 이데올로기』와 『그룬트리세』는 마르크스 당대에 읽힌 책이다. 실제로는 마르크스의 주요 저작 상당수가 생전에 출판되지 못했습니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1845년에서 1846년 사이에 쓰였지만 1932년에야 처음 출간됐고,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은 1939년, 『잉여가치론』 완전판은 1963년과 1971년에 모스크바에서 나왔습니다. 이 텍스트들을 당대 저작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통념: 마르크스가 아버지 유산의 3분의 1을 벨기에 노동자 무장에 썼다. 실제로는 그것이 1848년 혁명기 벨기에 법무부의 기소 근거였을 뿐이고, 영어 위키백과는 그 이야기의 진위(veracity)가 논쟁적이라고 명시합니다.
통념: 마르크스가 가정부 헬레네 데무트와의 사이에 사생아 프레디를 두었다. 실제로는 1962년부터 제기된 주장이지만 확증할 문서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원문에 적혀 있습니다. 확정된 사실로 서술하면 안 되는 대목입니다.
통념: 마르크스의 사망일과 나이는 자료마다 똑같다. 실제로는 한국어 위키백과 안에서만도 어긋납니다. 서두는 1883년 3월 14일 사망으로 적지만 '말년사' 절 본문은 5월 31일로 적혀 있고, 사망 나이도 영어 위키백과는 64세, 한국어 위키백과 본문은 63세로 다릅니다. 장례식 날짜(3월 17일)와 엥겔스 추도사의 '3월 14일' 언급이 모두 3월 14일 사망을 뒷받침하고, 1818년 5월생 기준으로 만 64세가 계산상 맞습니다. 『자본론』 2권 출간연도도 한국어 위키백과 본문은 1893년 7월, 같은 문서의 저서 목록은 1885년으로 서로 어긋나며 후자가 영어 위키백과와 일치합니다. 박사논문 연도 역시 영어 위키백과 본문은 1841년, 한국어 위키백과 저서 목록은 1842년으로 갈립니다.
통념: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는 마르크스의 반유대주의를 입증한다. 실제로는 논쟁적인 지점입니다. 폴 존슨(Paul Johnson),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 등이 그런 해석을 내놓았지만, 웬디 브라운(Wendy Brown), 로버트 파인(Robert Fine), 데이비드 맥렐런(David McLellan), 프랜시스 윈(Francis Wheen) 등이 이를 반박합니다.
마르크스는 언제 어디서 태어나고 죽었나요
카를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프로이센 왕국 트리어의 브뤼켄골목 664번지에서 태어나, 1883년 3월 14일 오후 런던에서 기관지염과 흉막염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 당시 무국적자 신분이었고 만 64세였습니다.
『자본론』은 몇 권이고 언제 나왔나요
『자본론』은 세 권입니다. 제1권은 1867년에 마르크스 생전에 출간됐고, 제2권은 1885년, 제3권은 1894년 10월에 엥겔스의 편집으로 사후 출간됐습니다. 러시아어판 제1권 3,000부는 1872년 3월 27일에 나왔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어떻게 만났나요
마르크스는 1844년 8월 28일 파리의 카페 드 라 레장스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처음 만났고, 이 만남이 평생의 협력관계로 이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공산당 선언》(1847년 12월에서 1848년 1월 사이 집필, 1848년 2월 21일 첫 공개)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함께 썼습니다.
토대와 상부구조가 무슨 뜻인가요
마르크스는 사회의 경제적 층위, 즉 생산수단과 생산관계로 이뤄진 생산양식을 '토대'(하부구조)라 부르고, 그 위의 문화적·정치적 층위를 '상부구조'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상부구조가 토대에 의해 규정된다고 봤습니다.
마르크스의 장례식은 어땠나요
장례식은 1883년 3월 17일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동편의 불가지론자·무신론자 구역에서 치러졌고, 참석자는 아홉에서 열한 명 정도였습니다. 당대 신문은 스물다섯에서 서른 명으로 보도했습니다. 1954년 11월 묘가 현재 위치로 이장됐고, 1956년 3월 14일 로런스 브래드쇼의 흉상이 있는 새 묘비가 제막됐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를 읽을 때 기억할 것은 세 가지쯤입니다. 첫째, 그의 분석은 도덕적 규탄이 아니라 구조 설명을 겨냥합니다. 잉여가치는 나쁜 사장 이야기가 아니라 노동자를 살리는 비용과 노동자가 만드는 가치 사이의 간격 이야기고, 상품물신성은 개인의 착각이 아니라 상품 사회가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둘째, 우리가 아는 '마르크스'의 상당 부분은 마르크스가 발표하지 않은 원고와 다른 사람이 손댄 정리에서 왔습니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1932년, 『그룬트리세』는 1939년에야 나왔고, 『자본론』 2·3권은 엥겔스의 편집을 거쳤으며,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틀은 엥겔스와 레닌 쪽에서 왔습니다.
셋째, 자료 자체가 서로 어긋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망 나이, 박사논문 연도, 『자본론』 2권 출간연도가 한국어와 영어 위키백과 사이에서, 심지어 한국어 위키백과 안에서도 갈립니다. 마르크스를 정확히 인용하려는 사람은 이 어긋남을 먼저 확인하고 들어가는 편이 좋습니다.

카를 마르크스
Karl Marx
1818년
역사는 계급투쟁, 자본주의를 비판한 사상가.

프리드리히 엥겔스
Friedrich Engels
1820년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주의 이론을 세운 사람.

이고
Li Ao
772년
성(性)의 회복으로 성인에 이름을 논한 당대의 유학자.

데모크리토스
Democritus
기원전 460년
세상은 더 쪼갤 수 없는 원자로 이루어졌다고 본 원자론자.

에피쿠로스
Epicurus
기원전 341년
참된 쾌락은 마음의 평온이라 본 행복의 철학자.

미하일 바쿠닌
Mikhail Bakunin
1814년
국가 자체를 거부한 무정부주의자.

게오르크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년
역사는 정반합으로 나아간다고 본 변증법의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Ludwig Feuerbach
1804년
신은 인간이 자기를 투사한 것이라 본 사람.

카를 마르크스
Karl Marx
1818년
역사는 계급투쟁, 자본주의를 비판한 사상가.

프리드리히 엥겔스
Friedrich Engels
1820년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주의 이론을 세운 사람.

이고
Li Ao
772년
성(性)의 회복으로 성인에 이름을 논한 당대의 유학자.

데모크리토스
Democritus
기원전 460년
세상은 더 쪼갤 수 없는 원자로 이루어졌다고 본 원자론자.

에피쿠로스
Epicurus
기원전 341년
참된 쾌락은 마음의 평온이라 본 행복의 철학자.

미하일 바쿠닌
Mikhail Bakunin
1814년
국가 자체를 거부한 무정부주의자.

게오르크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년
역사는 정반합으로 나아간다고 본 변증법의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Ludwig Feuerbach
1804년
신은 인간이 자기를 투사한 것이라 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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