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와 문답법, 그가 남기지 않은 글이 남긴 것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경 태어나 기원전 399년 세상을 떠난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로, 상대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 답변의 모순을 드러내는 문답법(엘렝코스)으로 서양 철학의 방향을 바꿔놓은 인물입니다. 그는 평생 단 한 줄의 저작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사상은 오직 플라톤·크세노폰 같은 제자들과 아리스토파네스·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을 통해서만 전해집니다. 기원전 399년 불경죄와 청년 타락죄로 기소돼 사형 선고를 받고 독배를 마시고 죽었습니다.
| 항목 | 내용 |
|---|---|
| 생몰 | 기원전 470년경(자료에 따라 469년) ~ 기원전 399년. 한국어 위키백과는 사망일을 기원전 399년 5월 7일, 향년 71세로 명시 |
| 출생지 | 아테네의 데메 알로페케 |
| 가족 | 아버지는 석공 소프로니스코스, 어머니는 산파 파이나레테. 아내 크산티페와 아들 셋 |
| 전통 | 고대 그리스 철학. 사후 아카데메이아·리케이온·견유학파·스토아학파의 공통 뿌리 |
| 대표 저작 | 없음. 본인 저작 전무 |
| 핵심 개념 | 문답법(엘렝코스), 무지의 자각, 다이모니온, 에우티프론의 딜레마 |
| 1차 자료 문제 | '소크라테스 문제' — 플라톤·크세노폰·아리스토파네스·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이 서로 상충해 역사적 소크라테스의 사상 재구성이 사실상 불가능 |
소크라테스는 누구인가요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경부터 기원전 399년까지 아테네에서 살았던 철학자입니다. 아버지는 돌을 다루는 석공 소프로니스코스, 어머니는 아이를 받는 산파 파이나레테였고, 아테네의 행정 구역인 데메 알로페케에서 태어났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당대 미의 기준과 한참 멀었다고 전해집니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는 들창코에 눈이 튀어나왔고 배가 컸다고 묘사됩니다. 위생에도 무관심해서 목욕을 드물게 했고 맨발로 다녔으며, 가진 옷이라고는 낡은 외투 하나뿐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은둔한 사색가가 아니라 도시의 일에 몸을 담근 사람이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종군했고, 플라톤에 따르면 세 차례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기원전 406년에는 500인 평의회의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했습니다.
왜 소크라테스는 책을 한 권도 안 썼나요
소크라테스가 직접 쓴 글은 단 한 편도 없습니다. 그의 사상으로 알려진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제자였던 플라톤과 크세노폰, 그를 희극에서 다룬 아리스토파네스, 그리고 후대의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기록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읽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들은 전부 남의 글 속 대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든 "닭 한 마리를 빚졌다"든, 모두 플라톤이 쓴 대화편에 등장하는 발언이지 소크라테스 본인의 육성 기록이 아닙니다. 이 점은 그의 사상을 다룰 때 늘 염두에 둬야 할 전제입니다.
기록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학술 용어를 낳았습니다. 소크라테스에 관한 기록들이 서로 어긋나서 역사적 실체를 정확히 복원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상황을 학계는 '소크라테스 문제(Socratic problem)'라고 부릅니다.
소크라테스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가요
'소크라테스 문제'는 플라톤·크세노폰·아리스토파네스·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이 서로 상충하기 때문에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확히 재구성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데는 학계의 인식이 대체로 일치합니다.
특히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그린 소크라테스가 상당히 다릅니다. 학자 거스리는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를 '참을 수 없이 잘난 척하고 자기만족적'이라고 평했습니다. 크세노폰이 그린 소크라테스에게는 플라톤 특유의 무지 고백이나 엘렝코스(반박술) 같은 요소가 없습니다.
기록자들의 위치도 제각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인이 아니라 그가 죽은 뒤에 태어났고,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20년간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을 한 번 거친 소크라테스인 셈입니다.
어느 기록을 믿을 것인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1818년 저작 《철학자로서 소크라테스의 가치》에서 크세노폰의 기록을 비판했고, 이 견해가 20세기 초까지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 무슨 뜻인가요
소크라테스식 문답법, 곧 엘렝코스는 상대에게 어떤 개념의 정의를 묻고 그 답변 안의 모순을 드러내는 대화 방식입니다. "용기가 뭡니까?" 하고 물은 뒤, 상대가 내놓은 정의를 따라가다 보면 그 정의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례에 부딪히게 만드는 식입니다.
이 방식은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 두드러집니다. 《변명》 《크리톤》 《고르기아스》 《국가》 1권 등이 대표적입니다. 상대는 자기가 확실히 안다고 믿었던 것을 사실은 정의조차 못 한다는 사실 앞에 서게 됩니다.
이런 대화를 담은 글은 하나의 문학 장르가 됐습니다. '소크라테스적 대화(logos sokratikos)'라는 명칭 자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것이라고 영어 위키백과는 전합니다.
문답법이 만들어낸 유명한 물음 하나가 《에우티프론》에 나옵니다. '경건함은 신의 뜻이기 때문에 선한가, 아니면 선하기 때문에 신의 뜻인가.' 이른바 '에우티프론의 딜레마'로 불리는 이 물음은 도덕의 근거를 신에 두려는 시도가 어디서 막히는지를 보여줍니다.
무지의 지가 무슨 뜻인가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을 안다'는 문장은 소크라테스의 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플라톤 《변명》에 이 문장이 그대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변명》의 한 진술에 근거해 후대에 정리된 표현입니다.
《변명》에서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한 말은 좀 더 구체적입니다. 그는 소피스트 에우에노스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에우에노스가 만약 정말로 이 기술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적당한 보수로 가르친다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제가 이런 것들을 안다면(epistamai) 자랑스러워했겠지만, 저는 이것들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다만 소크라테스가 모든 것에 대해 모른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변명》 29b6-7에서 그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불의를 행하고 신이든 인간이든 나보다 나은 자에게 불복종하는 것, 이것이 악이고 부끄러운 일임을 나는 안다." 도덕의 어떤 지점에서는 안다고 말한 셈입니다.
그가 정말로 자기 무지를 믿었는지, 아니면 겸손을 가장한 것인지는 지금도 학계에서 논쟁 중입니다. 굴리는 이를 가장이라고 보았고, 어윈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이모니온은 어떤 목소리였나요
다이모니온은 소크라테스가 어린 시절부터 들었다고 말한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특이한 점은 이 목소리가 무언가를 하라고 시킨 적은 한 번도 없고, 하려던 행동을 만류하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스스로 《변명》 31c-d에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이는 여러분이 제가 여러 곳에서 자주 언급하는 것을 들으셨을 것입니다—즉 제가 신적이고 다이몬적인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제 어린 시절에 시작되었고, 어떤 목소리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나타날 때마다 항상 제가 하려던 행동을 만류했을 뿐, 적극적으로 조언한 적은 없습니다."
오늘날 '데몬(demon)'이라는 말이 악마를 뜻하게 된 것은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과 무관합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후대 기독교도들이 이교 신비주의자들을 이단시하면서 붙인 함의라고 서술합니다. 다만 이 해석 자체는 논쟁적인 견해라는 점도 함께 알아두는 편이 좋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왜 사형을 당했나요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불경죄(아세베이아)와 청년 타락죄로 기소돼 하루 동안의 재판 끝에 유죄와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기소자는 시인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세 사람이었고 사형을 구형한 쪽은 멜레토스였습니다.
재판의 진행 방식이 결말을 갈랐습니다. 배심원단이 유죄로 표결한 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형벌을 제안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는 국가로부터 식사와 숙소를 제공받거나, 아니면 은 1미나의 벌금을 내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배심원단은 이를 거부하고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재판의 배경에는 아테네의 정치적 격변이 깔려 있습니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스파르타에 패배했고, 민주정 대신 친과두파 정부인 '30인 참주정'이 들어섰습니다. 기원전 403년에는 내전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시민들에게 사면령이 내려졌습니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참주정에 협조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404년 30인 참주정이 살라미스의 레온을 처형하려고 체포하라 명령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홀로 이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형 판결에 따라 헴록 독배를 마시고 죽었습니다. 플라톤 《파이돈》에 따른 그의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잊지 말고 갚아주게."
소크라테스는 정치를 어떻게 봤나요
소크라테스는 대중의 환심을 사는 일과 최선을 목표로 삼는 일을 다른 것으로 보았습니다. 플라톤 《고르기아스》에서 그는 칼리클레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몇 안 되는 아테네인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참된 정치의 기술을 취하고 참된 정치를 실천하는 사람 말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매번 하는 말은 대중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말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30인 참주정이 살라미스의 레온을 체포하라고 명령했을 때 소크라테스 혼자 이를 거부한 일이 그 실례입니다. 다수가 따르는 명령이라도 옳지 않다고 판단하면 따르지 않았습니다.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1945)에서 이런 소크라테스적 개인주의를 자신의 '열린사회' 개념과 연결지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후 철학에 어떤 영향을 줬나요
소크라테스 사후 거의 모든 고대 철학 학파가 그를 사상적 뿌리로 삼았습니다.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 견유학파, 스토아학파가 모두 여기 해당합니다. 예외는 에피쿠로스학파와 퓌론주의(회의주의)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습니다. 안티스테네스는 견유학파를, 아리스티포스는 쾌락주의로 알려진 키레네학파를, 에우클레이데스는 메가라학파를 세웠습니다. 한 스승에게서 금욕과 쾌락이 동시에 갈라져 나온 셈입니다.
플라톤을 통한 영향은 서양 철학사 전체를 덮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했고,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라고 썼다고 한국어 위키백과는 전합니다.
근대 이후에는 비판자도 나왔습니다. 니체는 첫 저서 《비극의 탄생》(1872)에서 소크라테스를 고대 그리스 문명이 쇠퇴한 원인으로 지목했고, 《우상의 황혼》(1887)에서도 비판을 이어갔습니다. 반대로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를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 《아이러니의 개념》을 썼습니다.
흔히 오해하는 것들
통념: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
실제: 이 말을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악법도 법이다(Dura lex, sed lex)'라는 경구는 로마시대에 처음 등장했고, 말한 사람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통념: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가 플라톤 《변명》에 나오는 문장이다.
실제: 이 정확한 문장 그대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변명》의 한 진술을 바탕으로 후대에 정리된 표현입니다.
통념: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태연히 받아 마셨다.
실제: 통설은 그렇지만 다른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그가 사약을 여러 차례 뒤엎어 결국 간수장이 강제로 먹였다는 이설이 있다고 서술합니다. 다만 이 부분은 출처 표기가 불명확해 신뢰도가 낮은 서술입니다.
통념: 다이몬은 악마 같은 존재였다.
실제: 소크라테스에게 다이모니온은 선악을 규정하는 신적 목소리가 아니라 특정 행동을 만류하기만 하는 중립적인 내면의 소리였습니다. '데몬(demon)'이 악마를 뜻하게 된 것은 후대 기독교도들이 이교 신비주의자들을 이단시하며 붙인 함의라고 한국어 위키백과는 서술합니다(이 해석 자체는 논쟁적입니다).
통념: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으면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알 수 있다.
실제: 기록들이 서로 상충해서 역사적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정확히 재구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인식입니다. 대화편 속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재구성한 인물이라는 전제를 놓치면 안 됩니다.
통념: 소크라테스의 도덕론이 기독교 윤리관에 큰 영향을 줬다.
실제: 한국어 위키백과 문서는 이렇게 서술하면서도 곧이어 "그러나 이는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그리스 철학이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기독교 윤리관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스스로 반박합니다.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므로 그대로 옮기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소크라테스는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나요?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경 태어나 기원전 399년에 죽었습니다. 출생년도는 자료에 따라 기원전 470년 또는 469년으로 조금씩 다르게 표기됩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사망일을 기원전 399년 5월 7일, 향년 71세로 명시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쓴 책은 무엇인가요?
소크라테스가 쓴 책은 없습니다. 그는 저작을 전혀 남기지 않았고, 그의 사상은 플라톤·크세노폰 등 제자들과 아리스토파네스·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을 통해서만 전해집니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나요?
플라톤 《파이돈》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은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잊지 말고 갚아주게"였습니다. 다만 이 역시 플라톤이 기록한 것이지 소크라테스의 육성 기록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죄로 기소됐나요?
불경죄(아세베이아)와 청년 타락죄 두 가지입니다. 기소자는 시인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세 사람이었고, 하루 동안의 재판 끝에 유죄와 사형이 선고됐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누구인가요?
가장 널리 알려진 제자는 플라톤과 크세노폰입니다. 그 밖에 안티스테네스는 견유학파를, 아리스티포스는 키레네학파를, 에우클레이데스는 메가라학파를 각각 세웠습니다.
정리
소크라테스를 읽는 일은 언제나 남의 기록을 통과하는 일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그를 쓴 사람들은 서로 다른 소크라테스를 그렸습니다. 학계가 '소크라테스 문제'라는 이름을 따로 붙여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도 남은 것이 있습니다. 상대에게 정의를 묻고 그 답의 모순을 따라가는 대화 방식, 안다고 믿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인지 되묻는 태도, 다수의 명령이라도 옳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 선택. 에피쿠로스학파와 회의주의를 빼고 고대의 거의 모든 학파가 그를 뿌리로 삼았고, 니체처럼 그를 문명 쇠퇴의 원인으로 지목한 사람조차 그를 통과하지 않고는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낡은 외투 한 벌에 맨발로 아테네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붙들고 물었던 사람이, 재판정에서 은 1미나를 내겠다고 제안했다가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웃에게 진 닭 한 마리 값을 갚아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참고 자료
- 영어 위키백과
- 한국어 위키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