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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배 한 척이 거센 폭풍을 만났어요. 파도가 갑판을 넘어오고, 사람들은 곧 죽을까 봐 새파랗게 질려 비명을 질렀죠. 그런데 배 한쪽 구석에서 새끼 돼지 한 마리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먹이를 우적우적 먹고 있었어요. 배에 같이 타고 있던 한 철학자가,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돼지를 가리키며 말했다고 해요. "현명한 사람은 저 돼지처럼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 철학자가 바로 피론이에요. 지금부터 2300년쯤 전, 고대 그리스에 살았던 사람이죠. 그가 평생 붙잡고 있던 질문은 딱 하나였어요. "어떻게 하면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 글은 그 답을 따라가 보는 이야기예요.
피론은 기원전 360년쯤 태어나 기원전 270년쯤까지, 아흔 살 가까이 산 그리스 철학자예요. 젊을 때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요. 그러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을 정복하러 떠날 때 그 군대를 따라 멀리 인도까지 걸어갔어요. 그리스에서 인도까지는 걸어서 몇 달이 걸리는 길이죠. 거기서 인도의 수행자들을 만나 무언가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왔다고 해요.
피론은 책을 한 권도 쓰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아는 그의 이야기는 대부분 제자들과 후대 사람들이 옮겨 적은 거예요. 그런데도 그는 '회의주의'라는 생각의 첫 단추를 끼운 사람으로 남았어요. 회의주의라고 하면 어렵게 들리지만, 뜻은 단순해요. "정말 그런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을까?" 하고 한 발짝 멈춰 서는 태도예요.
쉬운 예를 들어 볼게요. 한 친구는 지금 방이 덥다고 하고, 다른 친구는 춥다고 해요. 둘 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이에요. 그럼 이 방은 더운 방일까요, 추운 방일까요? 사실 방 그 자체가 '더운 것'이라거나 '추운 것'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워요. 사람에 따라, 그날 몸 상태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니까요.
피론은 세상 거의 모든 일이 이렇다고 봤어요. 꿀은 정말로 '단 것'일까요, 아니면 그냥 내 혀에 달게 느껴질 뿐일까요? 우리는 사물이 '진짜로 어떤지'는 끝내 알 수 없고, 그저 '나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만 알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피론은 어느 쪽이 옳다고 서둘러 단정 짓지 말고, 판단을 잠깐 멈추자고 했어요. 이 '판단을 멈춤'을 그리스 말로 에포케라고 불러요.
여기서 진짜 핵심이 나와요. 판단을 멈추는 게 왜 좋을까요? 우리가 괴로운 건 대개 '이건 반드시 이래야만 해'라고 마음에 못을 박아 두기 때문이에요. 시험은 무조건 잘 봐야 하는 것, 저 사람은 분명히 나쁜 사람, 이 일은 절대 손해라는 것. 이렇게 못을 박아 두면, 일이 조금만 다르게 흘러가도 마음이 크게 흔들리죠.
피론은 그 못을 살살 뽑아 보자고 한 거예요. "이게 꼭 나쁜 일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지?" 하고 한 칸 물러서면, 신기하게도 화나 두려움이 한풀 가라앉아요. 이렇게 찾아오는 잔잔한 마음, 바람이 잦아든 바다 같은 상태를 아타락시아라고 불러요. '흔들림 없음'이라는 뜻이죠. 폭풍 속 돼지가 보여 준 게 바로 이거예요. 돼지는 폭풍이 좋은지 나쁜지 따지지 않으니까, 따질 게 없어서 흔들릴 일도 없었던 거예요.
피론에 관해선 좀 과장된 이야기도 전해져요. 그가 판단을 안 하다 보니 길에 마차가 와도, 절벽이 나와도 피하지 않아서 친구들이 늘 곁에서 지켜 줬다는 식이죠.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이건 옛날에 기록을 남긴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건 좀 부풀려진 것 같다"는 말이 함께 따라다녔어요. 실제로 피론은 아흔 살 가까이 살았고, 고향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거든요. 정말 절벽도 안 피하는 사람이 그렇게 오래, 무사히 살기는 어려웠겠죠.
그러니 아타락시아를 '아무것도 신경 안 쓰는 멍한 상태'로 오해하면 안 돼요. 피론이 말한 건 위험 앞에서 눈을 감으라는 게 아니라,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미리부터 떨지는 말자'에 더 가까워요. 피할 마차는 피하되, 마음까지 미리 무너뜨리지는 말자는 거죠.
피론은 "우리는 사물이 진짜로 어떤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데서 출발했어요. 그래서 어느 쪽이 옳다고 못 박는 대신 판단을 잠시 멈추자고(에포케) 했고, 그렇게 힘을 빼면 마음이 잔잔해진다고(아타락시아) 봤죠. 폭풍 치는 배 위에서 태평히 먹이를 먹던 돼지처럼요. 오늘 어떤 일로 속이 부글거린다면, 한 번 물어볼 만해요. "이게 정말 그렇게까지 확실한 일일까?" 그 한 걸음 물러섬이, 2300년 전 피론이 찾아낸 마음 쉬는 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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