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저마다 거품 속에 산다고 말한 철학자 피터 슬로터다이크

비누방울 하나를 떠올려 보세요
여름날 빨대로 비누방울을 불면, 동그란 막 안에 아주 작은 세계가 생기죠. 그 안은 바깥바람을 막아 주는 아늑한 공간이에요. 잠깐이지만 그 방울 속은 따뜻하고 안전해 보여요. 그런데 어떤 철학자는 사람도 사실은 저마다 이런 보이지 않는 방울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했어요. 좀 이상하게 들리죠? 이 사람이 바로 독일 철학자 피터 슬로터다이크예요. 오늘은 이 낯선 이름의 철학자가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 천천히 풀어 볼게요.

피터 슬로터다이크는 누구일까요
그는 1947년 독일에서 태어난 철학자예요. 어려운 말을 쏟아내며 강단에 서 있는 학자라기보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어, 다들 왜 이렇게 살지?" 하고 묻는 사람에 가까워요. 텔레비전에 나와 철학을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을 오래 진행하기도 했으니, 책상에만 앉아 있던 사람은 아니에요. 1983년에 낸 책 한 권이 크게 화제가 됐는데, 제목이 '냉소적 이성 비판'이에요. 독일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나온 철학책 가운데 보기 드물게 많이 팔린 책으로 꼽혀요. 제목만 보면 딱딱해 보이지만, 그 안의 이야기는 의외로 우리 일상과 아주 가까워요.

다 알면서도 그냥 하는 마음
이런 친구를 떠올려 보세요. 밤늦게 과자를 먹으면 몸에 안 좋다는 걸 알아요. 정말 잘 알아요. 그런데도 "알지, 아는데…" 하면서 봉지를 또 뜯어요. 슬로터다이크가 말한 '냉소적 이성'이 딱 이런 마음이에요. 옛날 사람들은 몰라서 잘못했다면, 요즘 사람들은 알면서도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그냥 한다는 거예요. 그는 이걸 '계몽된 허위의식'이라고 불렀어요. 말은 어려워 보여도 풀면 간단해요. "알 만큼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사는 마음"이라는 뜻이에요. 그는 이 마음이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시대 전체에 퍼진 분위기라고 봤어요.

통 속에 살던 괴짜 할아버지
그런데 슬로터다이크는 이 냉소에 맞서는 오래된 인물을 한 명 데려와요. 2300년쯤 전 그리스에 살던 디오게네스예요. 이 사람은 집도 없이 커다란 항아리 같은 통 속에서 살았어요. 권력자였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찾아와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하자, "햇빛을 가리지 말고 좀 비켜 주시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요. 슬로터다이크는 이런 당당하고 능청스러운 태도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진짜 냉소와 구분해요. 힘센 사람이 다 알면서 짓는 차가운 비웃음과, 약한 사람이 권력의 잘난 척을 툭 건드려 바람을 빼는 익살은 전혀 다르다는 거죠.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차가운 냉소가 아니라 디오게네스 같은 능청스러운 용기라고 슬쩍 일러 줘요.

그래서 거품 이야기가 나와요
나이가 들면서 그는 더 큰 질문으로 옮겨가요.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서 살까?" 그가 내놓은 답이 바로 처음에 말한 방울, 곧 '구체' 또는 '거품'이에요.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세 권으로 펴낸 '구체' 연작에서 그는 이렇게 봐요. 우리가 가장 먼저 산 곳은 엄마 배 속이라는 따뜻한 방울이었어요. 자라면서 우리는 친구, 가족, 사랑하는 사람과 또 다른 방울을 만들며 살아요. 옛날 사람들은 신이나 우주라는 아주 커다란 하나의 방울이 세상 모두를 감싼다고 믿었고요. 그런데 오늘날엔 그 큰 방울이 터지고, 대신 작은 방울이 잔뜩 모인 거품 더미처럼 살게 됐다고 그는 말해요. 아파트를 떠올려 보세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십 가구가 저마다의 방울 속에서 따로, 또 같이 살죠. 그게 바로 그가 말한 거품이에요.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할까요
슬로터다이크의 말은 우리에게 거울 하나를 건네요.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냉소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내가 사는 방울은 너무 꽉 닫혀서 옆 방울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하거든요. 그는 정답을 딱 정해 주기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만드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자연스레 다음 질문이 따라와요. 닫힌 방울 속에 갇히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바꿔야 할까요?

정리
피터 슬로터다이크는 1947년에 태어난 독일 철학자예요. 그는 '냉소적 이성'이라는 말로 다 알면서도 모른 척 사는 오늘의 마음을 짚었고, 통 속의 디오게네스를 데려와 권력을 익살로 건드리는 다른 태도를 보여 줬어요. 또 사람은 저마다 보이지 않는 방울 속에 살며, 오늘날엔 큰 방울이 터진 자리에 작은 방울들이 모인 거품처럼 산다고 했어요. 어려운 이름 뒤에 숨은 그의 질문은 의외로 단순해요. 너는 지금 어떤 방울 속에 살고 있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