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Origin Corp. All Rights Reserved.
v1.0.10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929년 프랑스 철학 국가시험 심사위원단은 이례적인 메모를 남겼다.
1등은 사르트르에게 주지만, 진짜 철학자는 2등이라고.
아그레가시옹은 프랑스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 중 하나다.
쉽게 말하면, 철학 교수가 되기 위해 국가가 직접 치르는 최종 관문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21세에 이 시험을 통과했다. 역대 최연소였다.
그 해 같이 응시한 장폴 사르트르는 이미 한 번 떨어진 재수생이었다.
점수 차이는 근소했고, 심사위원들의 기록에는 '보부아르의 답안이 더 철학적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도 1등은 사르트르였다.
마치 팀 프로젝트를 혼자 다 해놨는데, 발표는 옆자리 동료가 하고 모든 공로가 그 사람에게 돌아간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역사는 그 구도를 그대로 굳혀버렸다.
수십 년 동안 보부아르 앞에 붙은 수식어는 '철학자'가 아니라 '사르트르의 반려자'였다.

그들의 계약에는 유효기간이 있었다.
2년. 그런데 이 2년짜리 계약은 51년 동안 갱신되었다.
1929년,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에게 제안한 것은 결혼이 아니었다.
조건은 두 가지였다. 서로를 '필연적 사랑'으로 두되, 다른 연인은 자유롭게 사귈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숨김없이 고백할 것.
'투명한 관계'라는 조건이 들리기엔 평등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사르트르의 연인 목록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 이야기는 파리 지식인 사회에서 거의 무용담처럼 돌아다녔다.
반면 보부아르가 넬슨 올그렌이라는 미국 소설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녀는 시카고와 파리 사이에서 수백 통의 편지를 쓰며 찢어졌다.
올그렌은 결국 말했다. "당신의 1순위가 될 수 없다면 나는 떠나겠어."
그는 떠났다.
계약은 계속됐다.
보부아르는 남았다.

1949년, 한 권의 책이 프랑스에서 좌파와 우파와 가톨릭교회를 동시에 분노하게 만들었다.
세 진영이 한 목소리를 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제2의 성』은 여성의 삶을 철학적으로 해부한 약 1000페이지짜리 책이다.
쉽게 말하면, '왜 여자는 항상 2순위 인간으로 살아왔는가'를 역사와 철학과 생물학을 동원해 파헤친 작업이다.
출간 첫 주에 2만 부가 팔렸다.
그리고 바로 그 주, 바티칸은 이 책을 금서 목록에 올렸다.
금서 목록이란 가톨릭교회가 신도들에게 읽지 말라고 공식 지정한 책들의 목록이다.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은 '포르노그래피'라며 비난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는 보부아르에게 직접 말했다. "당신은 프랑스 남성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어."
SNS에 올린 글 하나가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받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 글이 어느 한쪽의 적이 아니라 기존 질서 전체의 적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금서 목록에 오른 바로 그 문장은 이후 모든 페미니즘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프랑스어로 On ne naît pas femme, on le devient.

보부아르의 관 뚜껑이 닫힐 때, 그녀의 왼손에는 반지 하나가 있었다.
51년을 함께한 사르트르의 것이 아니었다.
1986년, 78세로 세상을 떠난 보부아르는 유언에 따라 사르트르 곁 몽파르나스 묘지에 합장되었다.
파리 중심부에 있는 이 묘지는 프랑스 지식인들이 잠든 곳으로 유명하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실존주의의 상징적 커플로 나란히 누웠다.
그런데 그녀 손가락의 은반지는 넬슨 올그렌의 것이었다.
올그렌은 이미 1981년에 세상을 떠난 뒤였다.
보부아르는 그와 헤어진 후에도 그 반지를 36년 동안 빼지 않았다.
평생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로운 관계"를 선언한 철학자가, 끝내 빼지 못한 반지 하나.
이별한 후에도 차마 버리지 못하는 물건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그것이 서랍 속이 아니라 자기 손가락 위에 36년간 있었다면, 그건 철학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의 이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