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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가위 하나를 떠올려 볼게요. 가위는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이미 "종이를 자르는 물건"이라는 쓸모가 정해져 있었어요. 누군가 머릿속에 "자르는 도구가 필요해" 하고 먼저 생각했고, 그 생각에 맞춰 모양과 날을 만들었죠. 그러니까 가위는 쓸모가 먼저고, 그다음에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아기는 어떨까요? 아기는 태어날 때 "너는 이걸 하려고 태어났어"라는 쪽지를 손에 쥐고 나오지 않아요. 일단 먼저 태어나고,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될지 스스로 만들어 가요. 장폴 사르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바로 이 차이에 평생 매달렸어요. 1905년부터 1980년까지, 일흔다섯 해를 산 사람인데, 어려워 보이는 그의 말들도 사실은 이 가위와 아기 이야기에서 출발해요.

길에 놓인 돌멩이 하나를 봐요. 돌멩이는 자기가 돌멩이라는 걸 몰라요. "나는 왜 여기 있지" 하고 고민하지도 않고요. 그냥 거기 빈틈없이 꽉 차서 있어요. 어제도 돌멩이였고 오늘도 돌멩이고, 자기 자신과 한 치의 거리도 없이 딱 붙어 있죠.
이렇게 "그냥 그것인 채로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을 사르트르는 즉자라고 불렀어요. 말이 어렵게 들리지만, "자기 자신에 그대로 들러붙어 있다"는 뜻이에요. 컵, 책상, 벽돌 같은 사물들이 다 즉자예요. 자기를 의심하지 않고, 다른 무언가가 되려고 애쓰지도 않는, 마음의 빈틈이 전혀 없는 상태요.

사람은 달라요. 밤에 자려고 누우면 "내가 아까 그 말을 왜 했지" 하고 오늘의 나를 다시 떠올려 봐요. 거울 앞에서 "나 좀 달라지고 싶은데"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신기하죠? 나인데도 나를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어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마주 보는 존재를 사르트르는 대자라고 불렀어요. "자기를 마주한다"는 뜻이에요. 돌멩이는 자기에게 딱 붙어 있는데, 사람 마음은 자기에게서 살짝 떨어져 자기를 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늘 "지금의 나"와 "되고 싶은 나" 둘로 갈라져 있어요.

바로 여기서 무가 나와요. 돌멩이에는 빈틈이 없는데, 사람 마음에는 빈틈이 있어요. "지금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에 늘 틈이 벌어져 있죠. 이 텅 빈 틈, 아직 채워지지 않은 자리를 사르트르는 무, 곧 없음이라고 불렀어요.
이 빈틈은 모자란 게 아니라 오히려 힘이에요. 친구가 시켜도 "아니, 안 할래"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냉장고를 열고 "어, 케이크가 없네" 하고 없는 것을 느끼는 것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내일을 상상하는 것도 다 이 빈틈 덕분이에요. 꽉 찬 돌멩이는 절대 못 하는 일이죠.

이제 가위와 아기 이야기로 돌아가요. 가위는 쓸모가 먼저 정해지고 만들어졌어요. 이 "미리 정해진 쓸모"를 본질이라고 해요. 반대로 사람은 일단 태어나서 존재부터 하고, 쓸모는 살면서 직접 정해요. 이 "일단 있음"을 실존이라고 하고요.
사르트르의 가장 유명한 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가 바로 이거예요. 사람한테는 정해진 사용 설명서가 없다는 뜻이에요. 의사가 될지 빵집을 열지, 어떤 사람이 될지는 태어날 때 적혀 있지 않고, 내가 하나하나 고른 선택들이 쌓여서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정해진다는 거죠.

빈틈이 있으니 우리는 자유로워요. 언제든 "아니"라고 하고 다른 길을 고를 수 있으니까요. 듣기만 하면 신나는 말 같지만, 사르트르는 여기에 무거운 짝꿍을 붙여요. 바로 책임이에요.
가위는 잘 안 잘려도 "설계가 그래서 그래"라고 핑계를 댈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핑계를 떠넘길 설계도가 없어요. 내가 고른 거니까 결과도 내 몫이에요.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고 했어요. 자유가 선물이 아니라 도망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온다는 말이에요.

사르트르의 어려운 말들은 결국 하나로 묶여요. 돌멩이 같은 사물은 빈틈 없이 꽉 찬 즉자고, 자기를 들여다보는 사람은 빈틈을 품은 대자예요. 그 빈틈이 바로 무인데, 이 없음 덕분에 우리는 "아니"라고 말하고 다른 내일을 상상할 수 있어요. 가위와 달리 사람은 쓸모가 미리 정해지지 않은 채 태어나서, 선택을 쌓아 자기를 만들어 가죠. 그래서 우리는 자유롭고, 그 자유만큼 책임도 함께 진다는 것, 이 한 문장이면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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