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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박사학위 논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에드문트 후설은 자기가 평생 할 일이 수학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의대에 합격해 놓고 첫 수업에서 "이게 아닌데"를 깨닫는 순간,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본 적 있잖아요.
후설은 이미 수학 박사까지 마친 뒤였어요.
그럼에도 그는 수학을 내려놓았어요.
후설은 베를린 대학에서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밑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바이어슈트라스는 '해석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당시 유럽 최고의 수학자였어요.
그런 스승 밑에서 공부를 마쳤으니, 수학자로서의 앞날은 탄탄대로였죠.
그런데 프란츠 브렌타노의 철학 강의가 모든 걸 바꿔버렸어요.
브렌타노는 심리학과 철학의 경계를 허문 오스트리아 철학자였어요.
그의 강의를 들은 후설은 "내가 진짜 증명해야 할 것은 숫자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보는가다"라는 걸 직감했어요.
반전이 있어요.
후설이 수학을 '버린'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는 수학의 꿈, 즉 엄밀하고 오류 없는 학문을 만들겠다는 꿈을 철학으로 옮겨 심었어요.
이후 평생의 프로젝트가 딱 하나로 압축됐어요.
"철학을 수학처럼 엄밀한 학문으로 만들겠다."
이 선언 하나가 20세기 철학의 지형을 통째로 바꾸게 돼요.

후설이 동료 철학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뜻밖에도 "생각을 멈추라"는 것이었어요.
2천 년간 철학자들은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물었어요.
그런데 후설은 그 질문 자체를 잠시 보류하라고 했어요.
답을 구하는 대신 질문을 '괄호 치는' 것, 이게 혁명이었어요.
이걸 후설은 에포케(epoché)라고 불렀어요.
원래 그리스어로 '판단 중지'를 뜻하는 말이에요.
쉽게 말하면 이런 거예요. 커피잔을 볼 때 "이 잔이 진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잠깐 접어두고, "내 눈에 이 잔이 지금 어떻게 보이는가"에만 집중하는 거예요.
누구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할 수 있는 사고 실험이에요.
하지만 이걸 학문의 방법론으로 격상시킨 사람은 후설이 처음이었어요.
이 방법을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해요. 세계가 어떠한지가 아니라, 의식에 나타나는 그대로를 기술하는 철학이에요.
1913년, 후설은 《이념들》을 펴냈어요.
현상학의 핵심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에요.
동료들의 반응은 차가웠지만, 젊은 철학자들은 열광했어요.
그중 한 명이 후설을 찾아와 제자가 되겠다고 했어요.
이름은 마르틴 하이데거였어요.
그리고 이 만남이 철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배신의 시작이 돼요.

"존경과 우정을 담아, 에드문트 후설에게."
이 문장은 철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헌정사이자, 가장 잔인하게 지워진 문장이에요.
하이데거는 후설이 직접 밀어준 제자였어요.
후설은 자신이 떠나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 자리에 하이데거를 추천했어요.
자기가 추천서를 써서 취직시켜 준 후배인 셈이에요.
하이데거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은 1927년 출간됐어요.
"존재란 무엇인가"를 정면으로 파고든 이 책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서 중 하나로 꼽혀요.
그리고 초판에는 스승에 대한 헌정사가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1933년, 상황이 완전히 뒤집혔어요.
나치 정권이 집권하자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이 됐고, 유대인 교수를 추방하는 법률을 직접 시행했어요.
유대인이었던 후설은 대학 도서관 출입조차 금지당했어요.
스승이 밀어준 자리에서 권력을 쥔 제자가, 그 권력으로 스승을 쫓아낸 거예요.
취직시켜 준 후배가 승진 후 자신을 모른 척하는 정도가 아니에요.
제도적 추방이었어요.
《존재와 시간》 재판이 나올 때, 헌정사는 사라져 있었어요.
"존경과 우정"이라는 말이 있던 자리는 그냥 비어버렸어요.
후설은 1938년, 하이데거와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어요.

1938년, 후설의 서재에는 4만 장의 원고가 남아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은 철학자가 아니라 스물아홉 살 수도사 한 명뿐이었어요.
후설이 남긴 원고는 전부 속기로 쓰여 있었어요.
속기는 일반인이 읽을 수 없는 약어 체계예요. 오늘날로 치면 암호화된 파일이나 다름없었어요.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 철학자의 원고는 언제 소각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이때 나선 사람이 헤르만 레오 판 브레다였어요.
벨기에 루뱅 대학 소속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였고, 당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스물아홉 살이었어요.
철학계와는 아무 연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판 브레다는 외교 행낭을 이용했어요.
외교 행낭이란 조약에 의해 수색이 금지된 외교관 가방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세관 검색을 받지 않는 특수 통로 같은 거예요.
그는 이 방법으로 4만 장의 원고와 후설의 장서를 트렁크 세 개에 나눠 담아 벨기에로 빼돌렸어요.
퇴사하는 날 회사가 내 작업물을 전부 폐기하겠다고 통보할 때, 아무 관계 없는 누군가가 몰래 USB에 백업해 주는 상황이에요.
다만 USB가 아니라 트렁크 세 개였고, 들키면 처벌받을 수 있는 나치 치하였어요.
이 원고들은 지금 벨기에 루뱅의 후설 아카이브(Husserl Archives)에 보존되어 있어요.
후설 전집 출간의 토대가 된 자료들이에요.
현상학이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건, 동료 철학자들의 헌신이 아니라 한 수도사의 물리적 용기 덕분이에요.
배신한 건 제자였고, 구한 건 수도사였어요.
후설의 이름을 지키려 나선 사람이 정작 철학계 바깥에 있었다는 사실.
어쩌면 그게 이 이야기에서 가장 철학적인 부분일지도 몰라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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