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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자기가 만든 단어가 유명해지는 걸 지켜보는 기분이 어떨까.
단, 그 단어가 자기 뜻과 정반대로 쓰이고 있다면.
찰스 샌더스 퍼스는 1878년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이라는 단어를 처음 세상에 내놓았다.
프래그머티즘이란, 쉽게 말하면 "어떤 생각이 옳은지 알고 싶으면, 그 생각이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낳는지 봐"라는 철학이다.
생각의 가치를 실제 결과로 판단하겠다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퍼스의 오랜 친구 윌리엄 제임스가 이 개념을 대중에게 소개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제임스는 이 철학을 "쓸모 있으면 진리다"는 식으로 풀어냈다.
퍼스가 보기에는 자기 생각이 완전히 다른 뜻으로 팔리고 있었다.
팀 프로젝트에서 아이디어를 냈는데 발표는 동료가 하고, 나중엔 그 동료의 아이디어로 기억되는 상황과 정확히 같다.
그래서 퍼스가 선택한 방법이 뜻밖이었다.
1905년, 그는 자신의 철학을 '프래그머티시즘(pragmaticism)'이라고 새로 이름 붙였다.
그가 직접 말했다. "도둑맞을 일 없을 만큼 못생긴 이름이다."
아무도 훔쳐 가지 않을 만큼 투박한 단어를 일부러 골랐다는 뜻이다.
단어를 발명한 사람이 결국 자기 단어에서 스스로 퇴장해야 했다.


1884년, 존스홉킨스 대학은 퍼스를 해고했다.
그의 논문이 틀려서가 아니었다.
그의 사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퍼스는 하버드를 나온 엘리트였고, 미국 정부 과학기관인 해안측량국(U.S. Coast and Geodetic Survey)에서 30년간 일하며 논리학과 기호학을 연구했다.
기호학이란 언어, 그림, 몸짓처럼 세상 모든 것이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내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1879년, 그는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유일한 정규 강의 자리를 얻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첫 번째 아내와 이혼이 공식화되기 전, 퍼스가 줄리엣 프루아시라는 여성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이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고, 대학은 바로 그를 내쳤다.
이후 퍼스는 평생 어떤 대학에서도 정규직을 얻지 못했다.
실력으로 쫓겨난 게 아니었다.
회사에서 실력은 인정받지만 사내 소문 하나로 커리어가 완전히 끊기는 상황, 그것과 정확히 같았다.


1907년 겨울,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동료들에게 모자를 돌렸다.
미국에서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가 굶고 있었기 때문이다.
퍼스는 펜실베이니아 주 밀퍼드의 낡은 저택 '아리스비(Arisbe)'에서 아내 줄리엣과 살았다.
난방비가 없어서 겨울에도 코트를 입고 책상에 앉았다.
식량이 떨어지면 이웃집 문을 두드려 빵을 얻어먹었다.
바로 그 윌리엄 제임스가 나섰다.
프래그머티즘을 대중화하면서 사실상 퍼스의 개념을 가져간 그 사람이, 자기 돈을 보내고 동료 학자들 사이에서 기부금까지 모아 퍼스에게 전달했다.
내 아이디어로 성공한 친구가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는 상황, 고맙지만 어딘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그 감정이다.
퍼스는 그 와중에도 매일 원고를 썼다.
굶으면서도 글을 놓지 않았다.
그가 죽고 나서 하버드에 기증된 원고는 8만 쪽이 넘었다.


1914년 퍼스의 부고는 신문 한구석을 차지했다.
그가 남긴 8만 쪽의 원고가 여러 학문을 뒤흔드는 데는 그로부터 20년이 더 걸렸다.
1930년대, 하버드가 원고를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학자들이 하나씩 발견했다.
논리학, 기호학, 과학철학 전반에 걸쳐 퍼스가 이미 핵심 개념들을 써놓았다.
현대 인공지능과 통계학의 기초 아이디어 상당수가 그 원고 안에 있었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퍼스를 "19세기 후반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라고 평가했다.
살아서는 단 한 번도 받지 못한 말이었다.
서랍 속에 묵혀둔 사업계획서를 10년 뒤 꺼내봤더니 지금 잘나가는 기업들이 이미 하고 있는 것과 똑같다면, 그 창업자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퍼스는 평생 인정받지 못했고, 굶었고, 자기 단어에서 쫓겨났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쓰는 논리, 기호, 과학적 추론의 언어 상당 부분은 아리스비의 낡은 저택에서 코트를 입고 쓴 8만 쪽 위에 서 있다.
그 원고들이 사후 시한폭탄처럼 터지기까지, 퍼스가 살아있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그 폭발을 예감했을지, 나는 그게 계속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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