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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그 아이의 죄목은 단 하나,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1960년대 미국 클리블랜드. 유대인 가정에서 자란 어린 주디스 버틀러는 학교에서 말이 지나치게 많다는 이유로 벌을 받았다.
부모는 그 아이를 랍비에게 보냈다. 입 좀 다물게 혼내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랍비는 아이를 혼내는 대신 책을 펼쳤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가 쓴 이 책은 신과 인간 본성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려 했던, 당시로선 위험천만한 사상서였다.
랍비는 유대 철학과 함께 그 책을 아이에게 가르쳤다.
훗날 버틀러는 이 경험이 자신의 철학적 출발점이었다고 직접 밝혔다.
침묵시키려 한 시도가 철학자를 탄생시켰다.
부모가 게임 못 하게 방에 가뒀더니 그 방에서 코딩을 독학해 개발자가 된 아이처럼, 말을 막으려 한 벌이 평생 말하는 직업의 씨앗이 되었다.

이 책은 두 개의 상반된 기록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인문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이자, 공식적으로 가장 못 쓴 문장에 선정된 책.
1990년 버틀러가 펴낸 『젠더 트러블』은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하나다. "젠더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행위로 만들어진다."
오늘날 젠더 담론의 기초가 된 이 생각이 처음 세상에 나온 책이다.
그런데 1998년, 학술잡지 《필로소피 앤 리터러처》가 주최한 '악문 대회'가 열렸다.
가장 읽기 힘든 문장을 골라 상을 주는, 반쯤 조롱 섞인 이벤트였다.
1위는 버틀러였다.
와이파이 공유기 설명서를 읽는 느낌을 아는가.
분명 중요한 걸 말하는 것 같은데, 세 번째 문장부터 길을 잃는 그 경험.
버틀러의 독자들이 공통으로 묘사하는 그 느낌이 이 대회에서 공식 인증을 받은 셈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해 못 하는 책이라면 아무도 인용하지 않는다.
누구나 영향받았지만 한 번에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모순, 그게 오히려 이 책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유 중 하나일지 모른다.

2017년 11월, 브라질 상파울루 거리에서 한 철학자의 인형이 불탔다.
시위대 중 그 철학자의 책을 읽어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버틀러는 그해 상파울루에서 열린 학술 컨퍼런스에 참석하러 브라질을 방문했다.
그러자 수백 명의 시위대가 공항과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마녀!" 그들은 그렇게 외쳤고, 버틀러의 얼굴을 붙인 짚 인형을 장대에 매달아 불을 붙였다.
죄목은 "젠더 이데올로기"를 퍼뜨린다는 것이었다.
대학 강의실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 학자가 중세 이단자처럼 화형에 처해졌다.
미적분 교과서 저자에게 수백 명이 항의 시위를 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그게 바로 이 상황의 실체다.
그런데 이 장면이 오히려 버틀러 이론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역설이 되었다.
난해하고 두꺼운 이론서를 읽은 적 없는 사람들이 그 저자를 가장 두려워한다는 것.
그것은 그 이론이 이미 현실을 바꿔놓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당신이 거울 앞에서 한 행동이 이미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을 증명하고 있다.
버틀러의 핵심 개념은 수행성(performativity)이다.
어렵게 들리지만 뜻은 간단하다. 젠더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하는 행동으로 만들어진다는 것.
출근할 때 옷을 고르는 일, 상대에 따라 목소리 톤을 바꾸는 일, 자리에 앉는 자세를 달리하는 일.
그 모든 행위가 버틀러가 말한 '수행'이다.
우리는 젠더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매일 '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9년, 버틀러는 본인이 논바이너리(non-binary)임을 밝혔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정체성, 그러니까 이분법 바깥에 있다는 선언이었다.
이론을 쓴 사람이 그 이론의 살아있는 사례가 된 순간이었다.
"젠더는 연기"라고 주장한다며 비난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버틀러가 말한 '연기'는 속임수가 아니다.
비난한 그 사람들 역시 매일 아침 옷을 고르고 자세를 바꾸며 젠더를 수행하고 있다는 아이러니, 버틀러는 그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랍비 앞에 앉아 스피노자를 처음 펼쳤던 말 많은 아이는, 결국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인형이 불태워진 철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론에 분노한 사람들조차 오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이론 안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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