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부모가 아이에게 언어를 금지할 수 있을까.
1879년, 인도 캘커타의 의사 크리슈나 다한 고시는 일곱 살 아들을 맨체스터의 목사 가정에 맡기면서 딱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인도어는 절대 가르치지 말 것.
벵골어도, 힌디어도, 산스크리트어도 안 된다.
오직 영국식 교육만.
소년의 이름은 오로빈도 고시였다.
그는 안개 낀 영국 도시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프랑스어를 익혔다.
어머니 말은 잊혀졌고, 인도는 점점 먼 나라가 되었다.
그렇게 13년이 지났다.
스물두 살의 오로빈도는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를 장학생으로 졸업했고, 인도고등문관시험(ICS)에 합격했다.
ICS는 당시 인도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다.
영국 제국의 관료가 되는 길, 그 마지막 관문만 통과하면 되었다.
관문은 승마 실기 시험이었다.
오로빈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일부러.
왜 그랬는지 그는 나중에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그 시점에 그는 이미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영국 제국의 공무원이 아니라, 그 제국에 맞서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자격을 잃은 것이 아니라, 버린 것이었다.
1893년, 오로빈도는 인도로 돌아왔다.
그가 디딘 땅은 태어난 나라였지만, 그 나라의 언어는 낯설었다.
어린 시절 강제로 잊었던 벵골어를 다시 배워야 했다.
그는 바로다 왕국에서 행정관 자리를 얻었고,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겉으로는 평범한 식민지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밤에는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로빈도는 동생 바린 고시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편지의 내용은 강의 노트가 아니었다.
폭탄 제조법 연구를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인도의 민족운동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청원과 연설로 영국과 대화하려는 온건파, 그리고 직접 행동으로 제국을 흔들려는 급진파.
오로빈도는 후자였다.
그는 벵골 전역에 아누실란 사미티 같은 비밀 무장 결사 세포를 심어나갔다.
공개 활동도 있었다.
그는 신문 '반데 마타람'의 편집자로 스와데시 운동의 급진파를 이끌었다.
스와데시는 "우리 것"이라는 뜻이다.
영국 상품 불매, 국산품 애용, 자치 요구.
오로빈도의 글은 날카로웠다.
영국 당국은 그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교수, 밤에는 혁명가.
그 이중생활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지, 오로빈도 자신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1908년 봄, 바린의 조직원 쿠디람 보스가 폭탄을 던졌다.
목표는 무자파르푸르의 영국 판사였다.
하지만 폭탄은 판사의 마차가 아닌 민간인 마차에 떨어졌다.
두 명의 영국 여성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쿠디람 보스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리고 영국 경찰은 배후를 쫓아 캘커타로 향했다.
오로빈도는 그해 5월 체포되었다.
혐의는 반역죄와 살인 공모.
그는 알리포르 감옥의 독방에 갇혔다.
감옥에서 그에게 남겨진 것은 거의 없었다.
면회도 제한되었고, 신문도 없었다.
다만 바가바드 기타가 있었다.
그는 기타를 읽었다.
반복해서, 집중해서.
그 1년 동안 그가 정확히 무엇을 경험했는지는 그 자신의 기록에만 남아 있다.
강렬한 신비 체험이라고 그는 훗날 썼다.
어떤 목소리, 어떤 현존.
재판에서 변호를 맡은 치타란잔 다스는 법정을 무대처럼 활용했다.
그의 최종 변론은 몇 시간에 걸쳐 이어졌고, 오로빈도를 단순한 피고가 아니라 인도의 예언자처럼 묘사했다.
배심원단은 무죄를 선고했다.
감옥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오로빈도는 다른 사람이었다.
폭탄과 신문과 비밀결사를 조직하던 혁명가는 그 독방 어딘가에서 다른 질문을 붙잡기 시작했다.
무죄 판결은 끝이 아니었다.
영국 당국은 오로빈도를 재차 체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10년, 그는 그 정보를 입수했다.
어느 날 밤, 그는 캘커타 항구에서 배에 올랐다.
목적지는 인도 남동쪽 해안의 작은 도시, 프랑스 식민지 퐁디셰리였다.
영국 영토가 아닌 곳.
영국 법이 미치지 않는 곳.
영국 경찰은 수년간 퐁디셰리 주변에 감시망을 유지했다.
프랑스 당국에 인도를 요청했다.
프랑스는 거부했다.
혁명가는 그렇게 증발했다.
퐁디셰리에 도착한 오로빈도는 이후 40년 동안 그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
정치 연설도, 비밀결사도, 혁명 조직도 더 이상 없었다.
그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걸어 들어갔다.
외부에서 보면 그것은 도주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자신에게 그것은 전환이었다.
제국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무언가를 향한 시작.
퐁디셰리의 오로빈도는 썼다.
매일, 수십 년 동안.
그는 '통합 요가'라는 수행 체계를 정립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변형시키려는 시도.
세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신성에 도달하려는 철학.
철학서 '신성한 삶(The Life Divine)'은 인간 의식의 진화를 논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거대한 작업이 있었다.
'사비트리(Savitri)'.
인도 신화의 여인 사비트리가 죽음의 신 야마로부터 남편을 되찾아 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서사시.
오로빈도는 이 작품을 수십 년에 걸쳐 거듭 고쳐 썼다.
완성된 분량은 2만 4천 행.
프랑스 출신의 미라 알파사, 제자들이 '어머니'라 부른 여성이 그의 곁에서 아쉬람 운영을 맡았다.
수천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퐁디셰리의 작은 공동체는 점점 커졌다.
1950년 12월 5일, 오로빈도가 숨을 거뒀다.
그 이후의 기록은 이상하다.
시신이 111시간 동안 부패의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고 수천 명의 목격자와 의사들이 보고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일곱 살에 영국으로 보내져 자신의 언어를 잊도록 강요받은 소년이, 결국 그 어떤 식민지 관료도 쓰지 못할 2만 4천 행을 남겼다는 것.
승마 시험에 나타나지 않은 날부터 이미 그 서사시는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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