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투스 마그누스가 주교직을 단 2년 만에 버린 이유
알베르투스는 중세에 '모든 것을 아는 학자'로 불렸다
13세기 유럽에서 그는 단 한 사람의 별명을 가졌어요.
모든 것을 아는 사람.
한 사람이 동시에 의대 교수, 식물원장, 천문대 소장이며 신학교 학장이라면 어떨까요.
그게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였어요.
13세기 가톨릭 수도회인 도미니코회의 수도사였던 그는 식물학, 동물학, 광물학, 천문학, 신학, 철학 전 분야에 걸친 책을 직접 썼어요.
학자들은 그를 Doctor Universalis, 즉 '만물박사'라고 불렀는데, 이 별명은 칭찬이라기보다 당황에 가까운 반응이었어요.
"어떻게 저 사람은 저걸 다 알지?"
그런데 진짜 반전이 있어요.
그 시대 수도사가 신학 말고 딴 걸 파고들면 의심받았는데, 알베르투스는 식물 줄기를 직접 잘라보고 동물을 해부했어요.
신학교 안에서 자연을 실험 대상으로 삼은 거예요.
그의 제자 중 한 명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예요.
훗날 가톨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신학자 중 하나로 꼽히는 그 사람이, 알베르투스 밑에서 배웠어요.
교황은 1260년 그를 레겐스부르크 주교로 임명했다
교황이 직접 임명한 자리였지만, 알베르투스는 자기 부츠 한 켤레로 그 자리를 버텼어요.
1260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알베르투스에게 특별 임무를 맡겼어요.
독일 남부 레겐스부르크 교구가 부패와 빚더미에 빠져 있었는데, 그걸 정리하라는 거였어요.
알베르투스는 거절하려 했지만 교황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런데 주교가 된 알베르투스의 행동이 특이했어요.
당시 주교는 말을 타고 다니는 게 지위의 상징이었는데, 그는 거부했어요.
지역을 순회하면서도 직접 걸어다녀서 'Bishop Boots(장화 주교)'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회사가 임원실을 줬는데, 본인은 카페테리아에서 회의하겠다고 고집하는 신임 임원과 같아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는데, 가장 낮은 방식으로 그 자리를 살았어요.
알베르투스는 2년 만에 주교직을 던지고 강의실로 돌아갔다
주교가 된 지 2년이 되던 해, 그는 사임서를 써냈어요.
신앙 때문이 아니라, 책 때문이었어요.
1262년, 알베르투스는 새 교황 우르바노 4세에게 사임을 청했어요.
교황이 받아들였고, 그는 즉시 쾰른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으로 돌아갔어요.
쾰른은 독일 서부의 도시로, 그가 오랫동안 강의하고 연구하던 근거지였어요.
종신 보장 대학 총장직을 받았다가 2년 만에 사표 내고 다시 평교수 책상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선택이었어요.
주교로 있는 동안 교구 행정, 빚 정리, 인사 관리가 하루를 채웠어요.
연구 원고 대신 청원서와 재정 장부가 책상을 덮었어요.
그는 쾰른으로 돌아간 뒤 십수 년간 계속 책을 썼어요.
그의 저작 중 가장 두꺼운 자연철학 작업이 이 시기에 완성됐어요.
주교직을 버린 게 그의 커리어를 끝낸 게 아니라, 오히려 살렸어요.
70대 노인 알베르투스는 죽은 제자를 변호하러 파리로 떠났다
1277년, 죽은 제자의 책이 파리에서 단죄되자 늙은 알베르투스는 길을 나섰어요.
파리 대주교 탕피에가 그해 219개의 철학·신학 명제를 공식적으로 단죄했어요.
단죄란 "이 주장은 틀렸으며 따르면 안 된다"는 교회의 공식 선언이에요.
그 명제들 중에 제자 아퀴나스의 가르침이 포함돼 있었어요.
문제는 아퀴나스가 이미 3년 전 세상을 떠났다는 거예요.
스스로 변호할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이 공격받고 있었어요.
그 소식을 들은 70대 후반의 알베르투스는 쾰른에서 파리까지 직접 갔어요.
자기 학설이 공격받은 게 아니었어요.
자기보다 먼저 죽은 제자의 이름을 지키러 간 거예요.
80세 은퇴 교수가 죽은 제자의 논문 시비를 풀려고 학회까지 직접 가는 모습이에요.
알베르투스는 1280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쾰른의 수도원에서, 책상 앞에서요.
주교관 집무실이 아니라, 수도원 연구실에서요.
그 아퀴나스는 알베르투스 사후 44년 뒤 성인이 됐어요.
스승은 그 결말을 보지 못했지만, 덕분에 제자의 이름이 살아남았어요.
알베르투스가 파리로 떠났던 그 발걸음이 없었다면, 역사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