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지금 한번 해보세요.
왼쪽 손목 안쪽에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살짝 올려놓으세요.
느껴지나요?
두근, 두근, 두근.
그게 당신의 심장이 보내는 신호입니다.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피가 팔 끝까지 밀려옵니다.
그 파도가 손목에서 느껴지는 거예요.
이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피는 심장에서 출발해서 온몸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초등학교 과학 시간에 배우는 내용이죠.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인류는 이 "당연한 사실"을 모른 채로 1,400년을 살았습니다.
피가 몸을 돈다는 걸 아무도 몰랐어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틀린 이론을 진실이라고 믿으면서요.
이 거짓말을 깨부순 사람이 있습니다.
영국 의사 윌리엄 하비.
그는 심장이 그저 열을 만드는 난로가 아니라, 피를 밀어내는 펌프라는 것을 세상에 처음 증명했습니다.
이야기는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기 2세기, 로마에 갈레노스라는 의사가 살았습니다.
갈레노스는 당대 최고의 의학자였습니다.
검투사들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인체에 대해 엄청난 지식을 쌓았어요.
그가 쓴 의학책은 수백 권에 달했고, 그의 이론은 "의학의 성경"처럼 여겨졌습니다.
갈레노스는 피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먹은 음식은 간으로 간다.
간이 음식을 피로 바꾼다.
그 피는 혈관을 타고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몸이 피를 써버리면 그냥 사라진다.
간이 또 새로운 피를 만든다."
비유하자면 이런 겁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고, 그 물을 컵에 담아 마시면 물은 사라진다.
수도꼭지(간)는 계속 새 물(피)을 만들어낸다.
피는 돌지 않는다. 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소비되고 끝이다.
지금 들으면 황당하지만, 이 이론은 무려 1,400년 동안 서양 의학의 정답이었습니다.
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까요?
첫째, 갈레노스의 권위가 너무 컸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갈레노스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건, 교회에서 성경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과 비슷했어요.
"감히 갈레노스가 틀렸다고?" 이 한마디면 토론은 끝이었죠.
둘째, 사람의 몸을 직접 열어볼 수 없었습니다.
중세에는 인체 해부가 금지되어 있었거든요.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책에 적힌 대로 믿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갈레노스의 이론은 마치 영원한 진실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의대에서도 가르치고, 의사들도 믿고, 환자들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1578년, 영국 포크스톤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윌리엄 하비.
하비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뒤, 당시 유럽 최고의 의과대학이 있던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파도바에서 하비는 운명적인 스승을 만납니다.
해부학자 파브리치우스.
이 스승은 정맥 안에 작은 판막이 있다는 걸 발견한 사람이었어요.
판막이란, 문처럼 한쪽 방향으로만 열리는 구조물입니다.
하비는 이 판막이 이상했습니다.
만약 갈레노스 말대로 피가 간에서 만들어져 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사라진다면, 왜 혈관 안에 "역류 방지 장치"가 있을까?
되돌아올 피가 없는데, 왜 역류를 막아야 하지?
이 작은 의문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하비는 본격적인 실험에 들어갑니다.
그의 실험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습니다.
실험 하나: 팔을 묶어보자.
하비는 사람의 팔 윗부분을 끈으로 꽉 묶었습니다.
그러자 묶인 부분 아래로 정맥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어요.
피가 심장 쪽으로 돌아가려는데, 끈이 막고 있으니까 정맥에 고인 겁니다.
끈을 조금 느슨하게 풀면?
부풀었던 정맥이 쭉 가라앉으면서, 피가 심장 방향으로 쏙 빠져나갔습니다.
이건 결정적인 단서였습니다.
피가 한 방향으로만 — 심장을 향해 — 흐르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요.
실험 둘: 산수를 해보자.
하비는 여기서 천재적인 발상을 합니다.
그는 심장이 한 번 뛸 때 얼마나 많은 피를 내보내는지 계산했어요.
심장은 1분에 약 72번 뜁니다.
한 번 뛸 때 약 60밀리리터의 피를 내보냅니다.
그러면 1시간이면?
72 × 60 × 60 = 약 259리터.
1시간에 259리터!
이건 성인 체중의 세 배가 넘는 양입니다.
만약 갈레노스 말대로 간이 이 피를 전부 새로 만든다면, 간은 1시간마다 259리터의 피를 음식에서 뽑아내야 합니다.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밥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그만큼의 피를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결론은 하나뿐이었습니다.
피는 사라지지 않는다.
피는 돌고 돈다.
심장에서 출발해 동맥을 타고 온몸으로 퍼진 뒤, 정맥을 타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심장은 이 순환을 만드는 펌프다.
마치 분수대의 물이 위로 솟구쳤다가 아래로 떨어지고, 다시 펌프가 밀어올리는 것처럼.
같은 피가 몸 안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던 겁니다.
1628년, 하비는 자신의 발견을 한 권의 책으로 펴냅니다.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
라틴어 제목의 약자를 따서 보통 De Motu Cordis라고 부릅니다.
하비는 이 책에서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갈레노스는 틀렸다. 피는 소비되지 않는다. 순환한다."
반응은 어땠을까요?
재앙이었습니다.
1,400년간 갈레노스를 신봉해온 의학계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프랑스 파리 의과대학은 하비의 이론을 공식적으로 거부했습니다.
동료 의사들은 그를 "미친 사람", "사기꾼"이라고 불렀어요.
가장 뼈아픈 타격은 현실에서 왔습니다.
하비의 진료실에서 환자가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피가 돈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의사한테 내 몸을 맡길 수 없다" —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하비는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책 서문에 이렇게 썼어요.
"이 책은 일부 사람들에게 해가 될 수 있다.
관습과 한번 뿌리내린 학설은 마치 제2의 천성이 되어,
옛것에 대한 사랑은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비난받을 걸 알면서도 발표한 겁니다.
진실이 불편할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진실이니까.
다행히, 시간이 하비의 편이었습니다.
하비의 이론을 직접 실험으로 확인해본 젊은 의사들이 하나둘 나타났습니다.
피를 묶고, 세고, 관찰하면 — 누가 해봐도 결과는 같았어요.
피는 정말로 돌고 있었습니다.
하비가 세상을 떠난 1657년 무렵에는, 유럽 주요 대학 대부분이 혈액순환론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1,400년 된 거짓말이 마침내 무너진 순간이었죠.
하비의 발견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수혈을 생각해보세요.
피가 순환한다는 걸 모르면, 다른 사람의 피를 넣어준다는 발상 자체가 나올 수 없습니다.
피가 사라진다고 믿는 세상에서 수혈은 말이 안 되니까요.
심장 수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장이 펌프라는 걸 알아야, 고장 난 펌프를 고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인공심장, 심장이식, 관상동맥 우회술 — 전부 하비의 발견 위에 세워진 기술입니다.
혈압 측정은 어떨까요.
건강검진에서 팔에 감는 그 커프.
피가 순환하고 있다는 전제가 없으면, "혈압"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비는 단순히 "피가 돈다"는 사실 하나를 밝힌 게 아닙니다.
그는 현대 의학이 태어날 수 있는 토대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비의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사실 의학이 아닙니다.
그건 바로 "당연한 것을 의심하는 용기"입니다.
1,400년 동안 모든 사람이 믿었던 이론.
교수님이 가르치고, 교과서에 실려 있고, 선배 의사들이 모두 따르는 이론.
거기에 "잠깐, 이거 이상한데?"라고 말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비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습니다.
권위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실험했습니다.
팔을 묶고, 심장 박동을 세고, 산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숫자가 말해주는 진실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심장은 뛰고 있습니다.
1분에 72번.
하루에 약 10만 번.
1년이면 3,700만 번.
그 한 번 한 번이, 400년 전 한 의사가 밝혀낸 진실 위에서 뛰고 있습니다.
손목에 다시 손가락을 대보세요.
그 맥박은 하비가 세상에 증명한 것의 증거입니다.
피는 사라지지 않는다.
피는 돌고, 돌고, 또 돈다.
0
개
| 분류 | 제목 | 댓글 | 조회 | 작성자 | 작성일 |
|---|---|---|---|---|---|
자유 | ㅎㅇ | 0 | 36 | 익명 | |
서양철학 | 쿠자누스가 평생 학문을 무지라 부른 이유 | 0 | 18 | 쿠스의기록자 | |
서양철학 | 피코 델라 미란돌라가 독살된 진짜 이유, 23세 천재의 짧은 생애 | 0 | 22 | 잊힌천재기록자 | |
서양철학 | 토마스 모어가 서명 하나로 죽은 날, 유토피아 저자의 마지막 | 0 | 17 | 사관의책상 | |
서양철학 | 알베르투스 마그누스가 주교직을 단 2년 만에 버린 이유 | 0 | 18 | 회랑의등불 | |
서양철학 | 루크레티우스가 신을 지우려 쓴 6권의 시 | 0 | 17 | 원자의시인 | |
서양철학 | 샌델이 29살에 스승 롤스를 공격한 날 | 0 | 26 | 정의의사관 | |
서양철학 | 볼테르, 복권으로 부자가 된 계몽주의 풍자가 | 0 | 19 | 풍자가윤 | |
서양철학 |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의학을 부정한 의사이자 회의주의자 | 0 | 25 | 의심자윤 | |
서양철학 | 칸트가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은 이유와 80년의 일상 | 0 | 17 | 철학산책 | |
서양철학 | 보부아르가 평생 거절한 결혼 서약과 51년 계약 | 0 | 23 | 사상의창고 | |
서양철학 | 후설의 4만 페이지 원고를 신부가 밀반출한 새벽 | 0 | 18 | 사상의궤 | |
서양철학 | 베르그송이 81세 빗속 줄에서 죽은 진짜 이유 | 0 | 19 | 지속의서가 | |
서양철학 | 윌리엄 제임스가 영매를 평생 좇은 이유와 흰 까마귀의 비밀 | 0 | 17 | 사색서재 | |
서양철학 | 퍼스가 자기 철학 이름을 추하게 만든 진짜 이유 | 0 | 17 | 사상서고 | |
서양철학 | 콩트가 스스로 인류교 교황이 된 날, 실증주의의 역설 | 0 | 17 | 사상서가 | |
서양철학 | 존 스튜어트 밀이 스무살에 무너진 이유 | 0 | 17 | 사상서가 | |
서양철학 | 벤담이 자기 시신을 박제로 만든 이유 | 0 | 16 | 역설서재 | |
서양철학 | 쇼펜하우어가 헤겔에게 정면 도전한 날, 30년 무명의 진짜 이야기 | 0 | 16 | 철학극장 | |
서양철학 | 소크라테스가 도주 대신 독배를 든 이유 | 0 | 20 | 고전탐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