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운동장에 서 있으면 그림자가 생긴다.
아침에는 길고, 점심에는 짧아진다.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이 현상.
그런데 약 2200년 전, 이 당연한 그림자에서 지구의 크기를 알아낸 사람이 있다.
이야기는 이집트 남쪽의 작은 도시 시에네(지금의 아스완)에서 시작된다.
매년 여름, 하짓날 정오가 되면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깊은 우물 바닥까지 햇빛이 쭉 내리쬐는 것이다.
다른 날에는 우물 벽에 그림자가 생기는데, 이날만큼은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졌다.
태양이 정확히 머리 위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날만큼은 막대기를 똑바로 세워도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다.
이 사실은 시에네 사람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다.
"하짓날에는 우물 바닥이 반짝거려" 같은 이야기가 퍼져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건 그냥 재미있는 동네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소문을 들은 한 남자는 달랐다.
이름은 에라토스테네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거대한 도서관의 관장이었다.
그는 이 소문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다.
"잠깐, 시에네에서는 그림자가 사라진다고?
그럼 같은 시각, 여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어떨까?"
이 질문 하나가 모든 것을 바꿨다.
에라토스테네스는 하짓날을 기다렸다.
정오가 되자 알렉산드리아의 땅에 막대기를 하나 꽂았다.
시에네처럼 그림자가 사라질까?
아니었다.
막대기 옆에 짧은 그림자가 또렷하게 생겼다.
같은 시간, 같은 태양인데 한 도시에서는 그림자가 없고, 다른 도시에서는 그림자가 있다.
이건 뭘 의미할까?
여기서 잠깐, 쉬운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축구공 위에 이쑤시개 두 개를 꽂았다고 상상해 보자.
하나는 꼭대기에, 하나는 살짝 옆에.
그 상태로 멀리서 손전등을 비추면, 꼭대기의 이쑤시개는 그림자가 거의 없다.
하지만 옆에 꽂힌 이쑤시개는 기울어진 만큼 그림자가 생긴다.
만약 축구공이 아니라 평평한 도마 위에 이쑤시개를 꽂았다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두 이쑤시개의 그림자는 똑같을 것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바로 이걸 깨달았다.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림자가 다르다는 건, 땅이 평평하지 않다는 뜻이야."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같은 태양 아래서도 두 도시의 그림자가 달라진 것이다.
사실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 자체는 에라토스테네스 이전에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이론이었다.
하지만 에라토스테네스는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둥글다는 걸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확히 얼마나 둥근지 계산하려 한 것이다.
에라토스테네스의 계산법은 놀라울 만큼 간단하다.
재료는 딱 세 가지뿐이다.
첫 번째 재료: 그림자의 각도.
알렉산드리아에서 막대기가 만든 그림자의 각도를 재니 약 7.2도였다.
이 각도가 뭘 뜻하냐면,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가 지구 표면에서 7.2도만큼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감이 안 온다면 피자를 떠올려 보자.
둥근 피자 한 판을 주문했다.
이 피자를 가운데에서 잘라 조각을 낸다고 해보자.
한 바퀴, 즉 원 전체는 360도다.
그렇다면 7.2도짜리 조각은 피자 전체의 몇 분의 1일까?
360 ÷ 7.2 = 50.
피자를 50조각으로 나눴을 때 딱 한 조각에 해당한다.
두 번째 재료: 두 도시 사이의 거리.
시에네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의 거리는 약 5,000스타디온이었다.
당시에는 킬로미터가 없었으니 스타디온이라는 단위를 썼다.
지금으로 치면 대략 800킬로미터 정도다.
(참고로 이 거리는 당시 낙타 대상이 이동하는 시간을 기반으로 측정했다. 대단하지 않은가?)
세 번째 재료: 비례식.
피자 한 조각(7.2도)이 800킬로미터라면, 피자 전체(360도)는?
800 × 50 = 40,000킬로미터.
끝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이렇게 지구 둘레가 약 4만 킬로미터라고 결론 내렸다.
정리하면 이렇다.
그림자 각도로 "두 도시가 지구의 50분의 1만큼 떨어져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 거리에 50을 곱하면 지구 전체 둘레가 나온다.
곱셈 한 번이 전부였다.
자, 그럼 에라토스테네스의 답은 맞았을까?
현대 과학이 측정한 지구의 실제 둘레는 약 40,075킬로미터다.
인공위성과 GPS와 레이저 기술로 잰 숫자다.
에라토스테네스의 답은 약 4만 킬로미터.
오차가 2퍼센트도 안 된다.
잠깐,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이 사람에게는 위성이 없었다.
GPS도, 컴퓨터도, 비행기도 없었다.
두 도시 사이의 거리조차 낙타가 걸어간 시간으로 어림잡았다.
도구라고는 막대기 하나, 눈 두 개, 그리고 머릿속 수학이 전부였다.
그런데 답이 거의 맞았다.
이건 운이 좋았던 걸까?
물론 약간의 행운은 있었다.
시에네가 거의 정확히 북회귀선 위에 있어서 하짓날 태양이 수직으로 내리쬐었고, 두 도시가 거의 같은 경도선(남북 방향 직선)에 있어서 거리 계산이 비교적 정확했다.
하지만 핵심은 운이 아니었다.
관찰하고, 질문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한 것이 핵심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놀라운 발견은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졌다.
로마 시대를 지나고 중세에 접어들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 자체가 흐려진 시기도 있었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업적이 다시 주목받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다.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하나 있다.
1492년,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항해하면 인도에 도착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콜럼버스가 참고한 지구 크기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수치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작게 추정한 다른 학자의 숫자를 썼다.
그래서 "금방 도착하겠지" 하고 출발했다가, 예상보다 훨씬 먼 바다 한가운데서 아메리카 대륙을 만난 것이다.
만약 콜럼버스가 에라토스테네스의 정확한 수치를 알았더라면, 그 무모한 항해를 시작이나 했을까?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 측정 말고도 여러 업적을 남겼다.
그중 지금까지도 수학 시간에 배우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라는 소수 찾기 방법이다.
소수란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눠지는 수를 말한다.
2, 3, 5, 7, 11 같은 수들이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는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1부터 100까지 숫자를 쭉 쓴다.
2의 배수를 지운다(2는 남기고).
3의 배수를 지운다(3은 남기고).
5의 배수, 7의 배수… 이렇게 배수를 하나씩 걸러내면, 마지막에 남는 수가 전부 소수다.
마치 체로 모래를 거르듯 합성수를 걸러내는 것이다.
22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방법이 지금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쓰인다.
프로그래밍을 배우기 시작한 학생들이 처음 도전하는 알고리즘 문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에라토스테네스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베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리스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다.
무슨 분야든 최고(알파)는 아니지만, 어떤 분야에서든 두 번째(베타)는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수학, 천문학, 지리학, 시, 철학까지.
뭘 하든 수준급이었지만, 딱 한 분야에서 최고라고 불리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역사는 그에게 다른 평가를 내렸다.
"막대기로 지구를 잰 사람."
이보다 더 멋진 별명이 있을까?
에라토스테네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건 간단하다.
대단한 발견에 대단한 도구가 필요한 건 아니라는 것.
필요한 건 주의 깊게 보는 눈과 왜?라고 묻는 습관이다.
우물에 비친 햇빛을 보고 "예쁘네" 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다.
그림자가 다른 걸 보고 "그런가 보다"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라토스테네스는 멈춰 서서 물었다.
"왜 여기서는 다를까?"
그리고 그 질문 하나가, 막대기 하나가, 지구의 크기를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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