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그가 가진 도구는 두 개뿐이었어요.
막대기 하나, 그리고 우물 속으로 떨어지는 한낮의 빛.
기원전 240년경, 에라토스테네스는 이런 이야기를 듣게 돼요.
이집트 남쪽 도시 시에네(현재의 아스완)에서는 하지 정오가 되면 깊은 우물 바닥까지 햇빛이 수직으로 쏟아진다는 거예요.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거죠.
그런데 같은 시각, 에라토스테네스가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막대기를 세우면 7.2도 각도의 그림자가 생겼어요.
여기서 그가 한 추론이 핵심이에요.
"두 도시에서 햇빛의 각도가 다르다면, 지구가 굽어 있기 때문이야."
그는 두 도시 사이 거리를 걸음 수로 측정하게 하고, 7.2도가 원 전체 360도의 몇 분의 일인지를 계산했어요.
360 나누기 7.2는 50.
그러니까 지구 둘레는 두 도시 사이 거리의 50배가 되는 거죠.
그렇게 나온 숫자가 약 4만 킬로미터예요.
실제 지구 둘레는 약 4만 75킬로미터.
오차가 2% 미만이에요.
GPS도 위성도 없이, 막대기 그림자 하나로 알아낸 숫자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비웃는 동안, 그는 소수를 거르는 체와 위도·경도 격자를 동시에 발명하고 있었어요.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라는 알고리즘이 있어요.
소수, 즉 1과 자신으로만 나눠지는 수를 빠르게 골라내는 방법인데, 오늘날 컴퓨터 과학 교과서에 그 이름 그대로 실려 있어요.
2300년 전에 만든 방법을 지금도 쓰는 거예요.
거기서 끝이 아니에요.
그는 세계지도에 처음으로 위도와 경도 격자를 그어 넣었어요.
오늘날 스마트폰 지도에서 위치를 콕 찍을 수 있는 좌표 체계의 원형이 에라토스테네스에게서 나온 거예요.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도 23.5도에 가깝게 측정했는데, 실제값은 23.44도예요.
그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관장이기도 했어요.
고대 세계 최대 학술 기관으로, 당시 알려진 거의 모든 지식이 한곳에 모여 있던 곳이에요.
그 안에서 한 사람이 검색 알고리즘과 GPS 좌표계와 천체관측 데이터를 동시에 만들어낸 셈이에요.
2등이라는 별명이 얼마나 틀린 평가였는지, 역사가 증명하는 데 2000년이 걸렸어요.
지구의 둘레를 측정한 노인은, 책 한 줄을 읽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식사를 끊었어요.
기원전 194년경, 80세 무렵의 에라토스테네스는 시력을 잃었어요.
안염으로 추정돼요.
평생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수십만 권 파피루스 두루마리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이제 그 글자들이 보이지 않게 됐어요.
그는 식음을 끊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어요.
평생 음악을 사랑한 사람이 청력을 잃은 뒤 더 살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에라토스테네스에게 읽고 측정하고 계산하는 것은 취미가 아니었던 거예요.
그게 삶 자체였던 거죠.
막대기 그림자 하나로 지구를 측정해낸 사람.
2등이라 불렸지만 수천 년이 지나도 그 이름이 교과서에 남은 사람.
그는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한 것에서 조용히 퇴장했어요.
당신이라면, 그 선택을 어떻게 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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