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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절에 가면 스님들이 금강경이나 법화경을 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 경전들은 처음부터 한자로 쓰인 게 아니에요. 원래는 저 멀리 인도 쪽의 말, 산스크리트어로 적혀 있었어요. 한국 사람이 영어 책을 읽으려면 누군가 한국어로 번역해 줘야 하듯이, 불경도 한자를 쓰는 동아시아 사람들이 읽으려면 누군가 옮겨 줘야 했지요.
그 번역을 한 사람 가운데 가장 크고 또렷한 발자국을 남긴 이가 바로 쿠마라지바예요. 이름이 낯설지요? 오늘은 약 1600년 전, 책상 앞에서 인도 말을 한자로 바꾸던 한 승려의 이야기예요.

쿠마라지바는 실크로드 한가운데에 있던 작은 나라 쿠차에서 태어났어요. 지금의 중국 신장 지역이에요. 동서양의 상인들이 낙타를 끌고 오가던 길목이라, 여러 나라 말과 종교가 뒤섞이던 곳이었지요.
아버지는 인도에서 건너온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그 나라의 공주였어요. 어릴 때부터 머리가 무척 좋아서 일곱 살 무렵에 출가했고, 인도 말과 서역 말을 자유롭게 오갔어요. 두 나라 말을 동시에 모국어처럼 쓰는 아이였던 셈이에요. 이 '두 언어를 다 아는 능력'이 나중에 그의 평생 일이 됩니다.

쿠마라지바가 똑똑하다는 소문은 멀리 중국 땅까지 퍼졌어요. 욕심이 난 한 임금이 여광이라는 장군을 보내 쿠차를 치고 그를 데려오게 했지요.
그런데 일이 묘하게 꼬여요. 장군 여광은 불교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애써 데려온 천재 번역가를 변방 도시에 거의 17년 동안 붙잡아 두기만 했어요. 비싼 값에 사 온 책을 펼쳐 보지도 않고 창고에 쌓아 둔 것과 비슷하지요. 하지만 그 긴 시간이 헛되지만은 않았어요. 갇혀 있는 동안 쿠마라지바는 중국말을 깊이 익혔거든요. 인도 말, 서역 말에 이어 한문까지, 번역에 꼭 필요한 세 번째 언어를 손에 넣은 거예요.
그러다 401년 무렵, 마침내 그는 당시 수도였던 장안으로 모셔져요. 지금의 시안이에요.

장안에서는 임금이 직접 그를 도왔어요. 큰 번역 작업장이 차려졌고, 수백 명에 이르는 학승들이 함께 모였어요. 쿠마라지바가 산스크리트 경전을 읽고 그 뜻을 풀어 주면, 둘러앉은 사람들이 받아 적고 문장을 다듬었지요.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큰 합창단 같은 작업이었어요.
그의 번역이 특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그는 단어를 하나하나 그대로 바꾸는 데 매달리지 않았어요. 외국 농담을 단어 그대로 옮기면 하나도 안 웃기잖아요. 웃음을 살리려면 뜻과 느낌을 우리말 농담으로 바꿔야 하지요. 쿠마라지바도 그랬어요. 소리 내어 읽었을 때 자연스럽고 마음에 와닿게 옮겼어요. 그래서 그가 만진 약 35종, 300권가량의 경전은 16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읽혀요. 우리가 종종 듣는 '색즉시공' 같은 표현도 그의 손을 거친 말투예요.

쿠마라지바가 옮긴 건 인기 있는 경전만이 아니었어요. 그는 중관이라는 불교 철학을 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들여왔어요. 인도의 사상가 용수가 세운 생각인데, 핵심은 '공'이라는 한 글자예요.
공을 흔히 '비었다'고 옮기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무지개를 떠올려 보세요. 분명히 눈앞에 보이지만 손으로 잡으려 다가가면 사라져요. 무지개는 물방울과 햇빛, 그리고 내가 선 자리라는 조건이 만나서 잠시 생긴 모습일 뿐, 그 자체로 단단한 알맹이를 가진 물건은 아니거든요. 세상 모든 것이 이렇게 조건이 모여 잠깐 이루어진다는 것,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 바로 공이에요. 중관은 '있다'와 '없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 길을 보자는 가르침이고요. 이 깊은 생각이 그의 번역을 타고 중국과 한국, 일본 불교의 바탕에 스며들었어요.

쿠마라지바는 인도 말과 서역 말, 한문을 모두 아는 드문 사람이었고, 17년의 갇힌 시간조차 번역을 위한 준비가 되었어요. 그는 글자를 베끼는 대신 뜻을 살려 옮겼기에 그의 경전이 오늘까지 읽히고, 공과 중관이라는 어려운 생각까지 동아시아의 말로 자리 잡게 했어요. 우리가 무심코 듣는 불경 한 구절 뒤에, 책상 앞에서 두 세계의 말을 잇던 한 번역가가 있었다는 것. 그것만 기억해도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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