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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상상해 볼까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외딴섬에 갓난아기가 홀로 남겨졌어요. 말을 가르쳐 줄 부모도, 글을 알려 줄 선생님도, 함께 놀 친구도 없어요. 이 아이가 혼자 자란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짐승처럼 살다 끝날까요, 아니면 스스로 생각하는 힘만으로 세상의 이치를, 더 나아가 '이 세계를 누가 만들었을까' 하는 질문의 답까지 찾아낼 수 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 한 철학자가 바로 이 상상을 진지하게 글로 옮겼어요. 그 사람이 오늘 이야기할 이븐 투파일이에요.

이븐 투파일은 약 900년 전, 지금의 스페인 남부에 해당하는 안달루스 지역에서 태어난 이슬람 철학자예요. 당시 이 땅은 이슬람 문화가 꽃피던 곳이라, 그리스 철학과 의학, 천문학 책이 활발히 번역되고 읽히던 지식의 중심지였어요.
그는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의사였고,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이기도 했어요. 한 사람이 의사, 학자, 정치 참모 역할을 다 했다니 요즘으로 치면 큰 병원 의사가 정부 정책 자문까지 맡은 셈이에요. 또 그는 자기보다 젊은 천재 철학자를 왕에게 소개해 주기도 했는데, 그 젊은이가 훗날 유럽에까지 이름을 떨친 이븐 루시드, 흔히 아베로에스라 불리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든 건 벼슬도 의술도 아니었어요. 바로 그가 쓴 한 권의 이야기책이었죠.

그 책의 제목은 '하이 이븐 야크잔'이에요. 우리말로 옮기면 '깨어 있는 이의 아들, 살아 있는 자' 정도 되는 이름이고, 주인공 소년의 이름이기도 해요.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가요. 사람 하나 없는 섬에서 아기 하이가 홀로 남겨져요. 다행히 어미 사슴 한 마리가 이 아기를 제 새끼처럼 거두어 젖을 먹이고 길러요. 하이는 동물들 사이에서 자라며 처음엔 그저 살아남는 법만 익혀요.
그런데 하이는 멈추지 않아요. 어느 날 자기를 키워 준 사슴이 죽자, 슬픔에 잠긴 채로 '도대체 사슴의 무엇이 사라졌기에 움직이지 않는 걸까' 하며 사슴의 몸을 살펴봐요. 살아 있게 하던 무언가가 몸뚱이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죠. 이렇게 하이는 불을 발견하고, 동물과 식물을 관찰하고, 별의 움직임을 올려다보면서 한 걸음씩 생각을 키워 가요.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니에요. 오직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머리로 따져 보면서요.

여기서부터가 이븐 투파일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예요. 하이는 관찰과 추론만으로 점점 더 큰 질문에 닿아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지는데, 그렇다면 이 모든 걸 있게 한,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이는 마침내 스스로의 생각만으로 '이 세계를 있게 한 존재'에 대한 깨달음에까지 이르러요.
이븐 투파일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해요. 사람에게는 누가 떠먹여 주지 않아도 세상의 이치와 가장 높은 진리까지 스스로 더듬어 갈 수 있는 '이성'이라는 힘이 있다는 거예요. 책으로 외운 지식이 아니라, 자연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끝까지 묻는 태도가 그 힘을 여는 열쇠고요.

이야기에는 반전이 하나 더 있어요. 어른이 된 하이는 이웃 섬에서 건너온 압살이라는 사람을 만나요. 압살은 종교의 가르침과 경전을 따라 자란 사람이에요. 둘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죠. 한쪽은 혼자 생각해서, 다른 쪽은 배워서 진리에 다가갔으니까요.
그런데 둘이 마음을 나눠 보니, 놀랍게도 도착한 곳이 같았어요. 스스로 깨우친 진리와 가르침으로 받은 진리가 결국 한 자리에서 만난 거예요. 이븐 투파일은 이 장면으로 '이성과 믿음은 서로 싸우는 사이가 아니라 같은 곳을 가리킬 수 있다'고 넌지시 말해요. 종교와 철학이 자주 부딪치던 시대에, 둘이 손잡을 수 있다고 본 셈이죠.

이 이야기는 '사람이 혼자 무인도에서 살아간다'는 설정을 진지하게 다룬 아주 이른 작품이에요. 그래서 무인도 하면 떠오르는 '로빈슨 크루소' 같은 후대의 이야기와도 종종 비교돼요.
게다가 약 500년 뒤 유럽에서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스스로 배우는 철학자'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널리 읽혔어요. 사람이 타고난 이성으로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훗날 유럽 사상가들이 인간의 앎을 고민할 때도 다시 불려 나왔고요. 작은 섬 위 한 소년의 이야기가, 바다 건너 시대를 건너 멀리까지 퍼진 거예요.

이븐 투파일은 약 900년 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사람이 혼자 진리에 닿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무인도 소년 하이의 이야기로 풀어낸 철학자예요.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두 가지로 기억하면 좋아요. 첫째, 자연을 끝까지 관찰하고 따져 묻는 이성의 힘은 우리 생각보다 멀리 간다는 것. 둘째, 그렇게 혼자 닿은 진리와 가르침으로 받은 진리는 서로 등지지 않고 같은 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 다음에 무인도 이야기를 만나면, 그 먼 조상 격인 한 소년과 그를 상상한 철학자를 한 번쯤 떠올려 봐도 좋겠어요.
TTS 음성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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