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크라테스가 98세에 굶어 죽은 이유, 연단에 오르지 않은 웅변가
이소크라테스는 평생 연단에 오르지 않은 웅변가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웅변가는 평생 연단에 한 번도 오르지 않았어요.
이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36년에 태어나 기원전 338년에 숨을 거뒀어요.
98년을 산 사람이에요.
그 긴 생애 동안 그는 고대 아테네에서 '웅변의 아버지'라 불렸어요.
그런데 공개 연설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이유는 그가 직접 글로 남겼어요.
자신의 삶을 변호한 글 안티도시스('재산 교환 변론')와 *파나테나이코스*에서 그는 솔직하게 고백해요.
목소리가 너무 약했고, 군중 앞에 서면 몸이 굳었다고요.
그래서 이소크라테스는 연설문을 써서 제자나 정치가에게 건넸어요.
그 글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낭독되는 방식이었어요.
오늘날로 치면, 평생 발표 한 번 못 한 사람이 발표 컨설팅 회사를 차려 그리스 전체 임원들을 가르친 셈이에요.
이소크라테스의 학교는 노동자 3년치 임금을 학비로 받았다
노동자 3년치 임금을 학비로 받는 학교가 기원전 4세기 아테네에 있었어요.
기원전 393년 무렵, 이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 수사학 학교를 열었어요.
수사학은 말로 상대를 설득하는 기술이에요.
오늘날로 치면 PT 스킬, 협상 능력, 여론 형성 기술을 한데 묶은 전문 과정이에요.
학비는 1000드라크마였어요.
당시 아테네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1드라크마였으니, 약 3년치 노동을 한꺼번에 내야 했어요.
지금으로 치면 수천만 원짜리 MBA 과정과 비슷한 느낌이에요.
이 학교는 플라톤이 아카데미를 세우기 약 6년 전에 먼저 문을 열었어요.
역사가 에포로스, 정치가 리쿠르고스, 장군 티모테오스 같은 그리스의 실세들이 여기서 배출됐어요.
이소크라테스는 플라톤과 정반대 입장이었어요.
플라톤이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을 가르쳤다면, 이소크라테스는 "실제 도시를 운영하는 말"을 가르치겠다고 선언했어요.
추상이 아니라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언어, 그게 그의 목표였어요.
이소크라테스는 연설문 한 편에 15년을 들였다
이소크라테스의 가장 유명한 연설문은 한 편을 쓰는 데 15년이 걸렸고, 그마저도 단상에서 읽지 않았어요.
그 작품이 기원전 380년에 발표된 *파네기리코스*예요.
'범그리스 축제 연설'이라는 뜻으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내전을 멈추고 함께 페르시아에 맞서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어요.
고대 로마의 수사학 교사 퀸틸리아누스는 이 한 편을 완성하는 데 이소크라테스가 10년에서 15년을 들였다고 기록했어요.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어요.
이 글은 올림피아 축제 연단을 위해 쓰였는데도, 이소크라테스는 그 자리에서 직접 읽지 않았어요.
15년간 다듬은 글인데, 발표는 다른 사람이 했어요.
이소크라테스에게 연설은 즉흥의 기술이 아니었어요.
글로 다듬고, 다듬고, 또 다듬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어요.
평생 단상에 서지 않으면서도, 그는 그리스 정치 담론의 언어 자체를 만들어냈어요.
이소크라테스는 98세에 9일을 굶고 숨을 거뒀다
98년을 살아남은 사람이, 마지막 9일을 굶어 죽기로 결심했어요.
기원전 338년 8월, 카이로네이아 전투가 끝났어요.
카이로네이아 전투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가 아테네·테베 연합군을 꺾고 그리스 전체의 패권을 쥔 결정적 전쟁이에요.
이 소식이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이소크라테스는 식음을 전폐했어요.
9일 뒤 그는 숨을 거뒀어요.
후대에 전해지는 기록 *열 명의 웅변가의 생애*에 남아 있는 내용이에요.
여기에 결정적인 아이러니가 있어요.
이소크라테스는 평생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강한 왕 아래 하나로 통일돼 페르시아를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어요.
그런데 그 주장이 실현된 결과가, 자기 도시 아테네의 멸망이었어요.
자신의 논리가 현실이 됐는데, 그 현실은 자신이 꿈꿨던 것과 달랐어요.
그는 그 모순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어요.
9일이라는 시간 동안, 굶으면서 그 모순과 마주 앉아 있었을 거예요.
98년을 살면서 수십 편의 연설문을 썼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말 대신 침묵을 선택했어요.
어쩌면 그게 그가 한 가장 긴 연설이었을지도 몰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