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니우스 루푸스, 1세기 로마에서 여성 교육을 외친 스토아 철학자
무소니우스는 딸과 아들을 똑같이 가르치라 가르쳤다
약 1900년 전, 한 로마인이 이미 한 줄로 답을 내놨어요.
"딸들도 아들과 같은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무소니우스 루푸스는 강의록에 단 한 단어로 답했어요.
"받아야 한다."
이게 얼마나 파격적인 말인지 느끼려면 시대를 떠올려야 해요.
1세기 로마는 시민권의 대부분이 남성에게만 주어진 사회였어요.
철학 학교는 남성의 영역이었고, 당시 다른 어떤 철학 학파도 이런 주장을 공개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조선시대 한복판에서 누군가 "여자아이도 과거 시험을 봐야 한다"고 강의록에 남긴 것과 비슷한 충격이에요.
그런데 무소니우스는 그냥 주장만 한 게 아니었어요.
그는 〈딸들도 아들과 같은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여성도 용기·정의·절제를 배워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풀어냈어요.
그의 근거는 간단했어요.
올바르게 사는 능력,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덕(德)"은 성별과 무관한 인간의 능력이라는 거예요.
스토아 철학이란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이성으로 판단하며 사는 것을 최고의 삶으로 보는 사상인데, 무소니우스는 이 능력이 남성만의 것이 아니라고 봤어요.
그는 남성의 외도도 여성과 똑같이 처벌해야 한다고 외쳤다
여성 교육보다 더 위험한 주장이 그의 강의록에 한 줄 더 있었어요.
무소니우스는 〈성적 쾌락에 관하여〉라는 강의에서 이렇게 선언했어요.
결혼한 남성이 노예나 매춘부와 관계를 맺는 것조차 부정(不貞), 즉 배우자를 배신한 행위라고요.
당시 로마 법은 남편의 외도에는 거의 침묵했어요.
하지만 같은 행위를 한 아내에게는 사형까지 가능했어요.
같은 잘못인데 한 명은 괜찮고, 다른 한 명은 목숨을 잃는 사회였어요.
무소니우스는 이 이중 기준에 정면으로 맞섰어요.
"남성이 자신에게 요구하지 않는 자제를 여성에게 요구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는 남성에게 똑같은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현대인의 눈에는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1세기 로마에서 이 주장은 사회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강의실 안에서 조용히 이 말을 한 게 아니라, 공개 강의에서 외쳤어요.
그리고 결국 황제의 눈 밖에 났어요.
네로 황제가 그를 죽음의 섬 갸로스로 추방했다
황제는 그를 죽이려고 섬에 보냈고, 그는 그 섬을 강의실로 만들었어요.
서기 65년, 네로 황제 암살을 시도한 피소 음모 사건이 터졌어요.
무소니우스는 연루 혐의로 갸로스(Gyaros)라는 섬으로 유배됐어요.
갸로스는 에게해에 있는 거의 무인도에 가까운 황무지 섬이에요.
식수도 부족했고, 죄수들이 굶거나 갈증으로 죽도록 내보내는 곳으로 알려진 섬이었어요.
오늘날로 치면 탈출도 불가능한 외딴 섬에 아무 지원 없이 버려지는 거예요.
하지만 그는 거기서 죽지 않았어요.
무소니우스는 섬에서 직접 식수원을 찾아냈어요.
그러자 제자들이 바다를 건너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고, 갸로스는 사실상 야외 학교가 됐어요.
직장에서 한직으로 좌천됐는데 후배들이 그 부서로 자청해서 따라가는 상황과 비슷해요.
황제가 사실상 사형 선고를 내린 그 섬에서, 무소니우스는 강의를 계속했어요.
네로가 죽고 나서야 그는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그런데 로마로 돌아온 뒤에도 편하지 않았어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다시 한번 추방됐어요.
두 황제에게 쫓겨난 철학자였지만, 그래도 강의를 멈추지 않았어요.
그의 이름은 잊혔지만 제자 에픽테토스가 스토아를 이었다
우리가 스토아 철학자로 떠올리는 이름들은 대부분 이 사람의 강의실에서 시작됐어요.
무소니우스의 가장 유명한 제자는 에픽테토스(Epictetus)예요.
노예 신분으로 태어나 풀려난 뒤 스토아 학교를 연 철학자예요.
에픽테토스의 〈담화록〉은 훗날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명상록〉을 쓸 때 뼈대가 됐어요.
오늘날 서점에서 팔리는 스토아 철학 책들의 상당 부분은, 결국 무소니우스의 강의실에서 흘러나온 생각들이에요.
하지만 정작 무소니우스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이유가 있어요.
무소니우스는 자신이 직접 글을 쓰지 않았어요.
제자 루키우스가 받아 적은 강의록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에요.
무대에서 빛나는 가수 뒤에 곡을 써 준 작곡가가 있는 구도예요.
가장 급진적인 주장을 한 스승의 이름은 잊혔고, 그의 사상을 더 온건하게 전달한 제자가 스토아의 얼굴이 됐어요.
그런데 어쩌면 이게 무소니우스다운 결말이기도 해요.
1900년 전에 딸도 아들처럼 가르치라고, 남편에게도 같은 잣대를 적용하라고 외쳤던 사람이에요.
두 황제에게 쫓겨나면서도 강의를 멈추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가 자기 이름이 후세에 남을지 신경이나 썼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