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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누스바움의 출발점은 열린 캠퍼스가 아니라 이제 막 여성 한 명을 들인 엘리트 방이었어요.
1972년, 마사 누스바움은 하버드 Society of Fellows의 첫 여성 주니어 펠로가 됩니다.
하버드 Society of Fellows는 젊은 학자에게 강의나 학위 숙제 없이 연구만 하게 해 주던 아주 좁은 문이에요.
오늘로 치면 회사도 학교도 아닌데, “너는 몇 년 동안 월급 걱정 말고 생각만 해”라고 허락받는 자리죠.
주니어 펠로는 박사 전후의 젊은 연구자가 뽑히는 연구 자리예요.
일반 학생도 아니고 조교수도 아니에요.
시험장 밖에서 갑자기 “이제 네 질문으로 경기해 봐”라는 초대장을 받은 셈이에요.
그런데 이 방이 중요해요.
남성 중심의 가장 차가운 학문 기관에 들어간 사람이 훗날 눈물, 사랑, 두려움을 철학과 법의 증거로 세우게 되거든요.
누스바움이 처음 붙잡은 공부는 고전학이었어요.
고전학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언어, 문학, 철학을 직접 읽는 학문이에요.
그에게는 오래된 책 속 인물들이 “사람은 왜 무너지고, 그래도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고 묻는 출발점이 됩니다.

누스바움이 철학에서 먼저 구한 것은 차가운 논증이 아니라 눈물의 자격이었어요.
철학이 정확해지려면 감정을 빼야 한다고들 믿었는데, 그는 반대로 말해요.
“감정을 빼면 우리가 정말 아끼는 것이 무엇인지도 같이 빠진다”는 쪽이죠.
그리스 비극은 착한 사람도 운과 사회의 힘 앞에서 무너질 수 있음을 무대 위 사건으로 보여 주던 고대 연극이에요.
성적표처럼 사람을 점수로 재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갑자기 집이 무너지고, 약속이 깨지고,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질 때 인간이 어떤 얼굴이 되는지 보여 주는 무대예요.
누스바움의 책 The Fragility of Goodness는 좋은 삶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를 그리스 비극과 철학으로 따진 1986년 저작이에요.
제목부터 이상하죠.
착하게 살면 단단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좋은 것일수록 깨지기 쉽다는 말이니까요.
그가 소설을 철학의 옆자리에 앉힌 것도 그래서예요.
소설은 “정답은 3번”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대신 한 사람이 사랑 때문에 흔들리고, 부끄러움 때문에 침묵하고, 두려움 때문에 도망치는 장면을 끝까지 따라가게 만들어요.
Upheavals of Thought는 감정이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가치 판단의 한 방식이라고 논한 2001년 저작이에요.
슬픔은 그냥 마음의 비가 아니에요.
내가 잃은 것이 내 삶에서 중요했다는 알림음이에요.
누스바움의 핵심 생각을 감정의 지성이라고 부를 수 있어요.
슬픔, 두려움, 사랑 같은 감정이 내가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려 준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감정은 사고의 방해물이 아니라, 때로는 사고가 도착하지 못한 곳을 먼저 비추는 손전등이에요.

누스바움에게 가난은 돈이 적은 상태만이 아니었어요.
같은 권리가 종이에 적혀 있어도, 누군가는 그 권리를 실제로 쓸 조건이 없거든요.
헬스장 회원권이 있다고 해볼게요.
그런데 갈 시간이 없고, 버스도 없고, 아이를 맡길 사람도 없어요.
그 회원권은 종이 위에서는 자유지만, 몸으로는 자유가 아니에요.
이 문제를 누스바움은 역량 접근법으로 정리해요.
역량 접근법은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삶을 고를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정의와 발전을 평가하는 방법이에요.
돈이 얼마냐가 아니라, 그 돈과 제도로 정말 학교에 가고, 병원에 가고,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여기에는 아마르티아 센의 문제의식이 큰 바탕이 됩니다.
아마르티아 센은 경제성장 숫자보다 사람이 누리는 실질적 자유를 봐야 한다고 주장한 경제학자예요.
국가 성적표를 GDP 한 줄로 끝내지 말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숨 쉬는 방식을 보자는 쪽이죠.
누스바움의 Women and Human Development는 여성의 삶을 통해 권리와 돈만으로는 존엄한 삶을 설명할 수 없다고 논한 2000년 저작이에요.
법에는 “모두에게 기회가 있다”고 적혀 있어도, 어떤 여성은 집 밖으로 나갈 결정권부터 빼앗겨 있어요.
그 순간 누스바움의 질문은 바뀝니다.
“그 사람에게 권리가 있나?”가 아니에요.
“그 사람이 그 권리를 쓸 수 있나?”예요.
그가 말한 중앙 역량 10가지는 인간다운 삶에 필요한 최소 조건 목록이에요.
생명, 건강, 안전, 생각, 감정, 선택, 관계, 자연과의 관계, 놀이, 정치와 재산을 다룰 힘 같은 것들이 들어가요.
거창한 이상 목록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답게 세워 두는 생활의 바닥이에요.

누스바움은 정의의 문턱에서 누가 빠졌는지를 물었어요.
정의를 가장 똑똑하고 독립적인 성인들의 약속으로 시작하면, 정작 보호가 가장 필요한 존재가 문밖에 남을 수 있거든요.
사회계약론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람들이 서로 규칙에 합의한다고 상상하며 국가와 권리를 설명하는 정치철학 전통이에요.
쉽게 말하면 “서로 손해 보지 않으려고 규칙을 만들었다”는 식의 출발이에요.
그런데 처음부터 회의실 의자가 건강한 성인에게만 맞춰져 있다면, 휠체어를 탄 사람은 회의에 들어오기 전부터 배제돼요.
누스바움의 Frontiers of Justice는 장애, 국적, 종의 차이가 정의의 대상에서 빠질 때 생기는 문제를 다룬 2006년 저작이에요.
여기서 그는 묻습니다.
“누가 규칙을 만들 수 있느냐”보다 “누구의 삶이 규칙의 보호를 받아야 하느냐”가 먼저 아니냐고요.
이 질문은 동물에게까지 갑니다.
Justice for Animals는 동물도 각 종에 맞는 삶을 펼칠 조건을 가져야 한다고 역량 접근법을 확장한 2023년 저작이에요.
동물을 인간처럼 만들자는 말이 아니에요.
고양이는 고양이답게, 새는 새답게, 각자의 몸과 감각으로 살아갈 조건을 봐야 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정의는 인간의 회의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들의 가능성을 묻는 일이 됩니다.
그가 비판한 종 구성원 자격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의의 안쪽에 들어오고, 동물이라는 이유로 바깥에 남는 기준을 가리켜요.
회사 출입증처럼 “인간”이라는 카드가 있어야만 보호받는다면, 고통을 느끼는 많은 존재는 문 앞에서 멈춰야 해요.
그래서 누스바움의 감정은 약한 감상이 아니에요.
누가 아프고, 누가 겁먹고, 누가 자기 삶을 펼치지 못하는지 끝까지 보게 만드는 철학의 눈이에요.
그 눈으로 보면 정의의 문은 아직 다 열린 게 아니라, 이제야 손잡이에 손이 닿은 것처럼 보입니다.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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