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치면 그 자리에서 끝날까, 성철 스님이 평생 밀어붙인 돈오돈수
절을 삼천 번 해야 만날 수 있던 스님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 백련암에는 한 스님을 만나려고 사람들이 줄을 섰어요.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었어요. 부처님 앞에 절을 삼천 번 하고 오라는 거였죠. 삼천 번이면 서너 시간을 꼬박 매달려야 하고, 다음 날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고된 일이에요. 높은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예외가 없었어요. 이 까다로운 스님이 바로 성철(1912년부터 1993년까지)이에요. 한국 현대 불교에서 가장 유명한 선승이고, 8년 동안 눕지 않고 앉은 채로만 수행했다는 이야기로도 잘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성철을 정말로 기억하는 이유는 따로 있어요. 그가 '깨달음'을 두고 800년이나 묵은 말다툼에 다시 불을 붙였거든요.
깨닫는 건 한순간, 그럼 그다음은
불교 수행의 목표는 '깨달음'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오래된 질문 하나가 생겨요. 깨달음은 단번에 '탁' 오는 걸까요, 아니면 조금씩 쌓이는 걸까요?
자전거를 떠올려 보면 쉬워요. 자전거 타는 법은 어느 순간 갑자기 몸이 알아채요. 수십 번 넘어지다가 어느 날 '어, 된다!' 하는 그 순간이 오죠. 그게 단번에 오는 깨달음, 불교 말로 '돈오'예요. '돈'은 단번에, '오'는 깨친다는 뜻이에요.
문제는 그다음이에요. '어, 된다!' 한 뒤에도 한동안은 비틀거리잖아요. 똑바로 잘 타려면 더 연습해야 해요. 이 '깨친 뒤의 연습'을 불교에서는 '점수', 천천히 닦는다는 뜻으로 불러요. 그러니까 깨달음과 닦음, 이 둘을 어떻게 짝지을 것인가가 오랜 숙제였던 셈이에요.
해는 단번에 떠도 얼음은 천천히 녹는다
성철보다 800년 앞선 고려시대에 지눌(1158년부터 1210년까지)이라는 큰스님이 있었어요. 지눌은 이렇게 정리했어요. 깨달음은 단번에 오지만, 그 뒤에도 묵은 버릇을 천천히 닦아야 한다고요. 이게 '돈오점수'예요.
지눌이 든 비유가 참 와닿아요. 해는 아침에 단번에 떠요. 하지만 밤새 낀 서리와 얼음은 햇살을 받고도 한참 지나야 녹죠. 마음이 밝아지는 건 한순간이지만(돈오), 오래 쌓인 욕심이나 화 같은 습관이 사라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점수) 거예요. 사람 마음이 그렇잖아요. 머리로는 '화내지 말아야지' 알면서도, 몸에 밴 버릇은 쉽게 안 빠지니까요. 이 생각은 한국 불교에서 700년 넘게 정답처럼 받아들여졌어요.
진짜 깨쳤다면 닦을 게 없다
그런데 성철이 여기에 정면으로 반대했어요. 1981년에 펴낸 『선문정로』라는 책에서요. 성철의 주장은 이래요. "진짜로 해가 떴다면 얼음은 이미 다 녹아 있어야 한다. 아직 얼음이 남아 있다면, 그건 애초에 해가 안 뜬 거다."
다시 자전거로 돌아가 볼게요. 머리로 '아, 페달을 이렇게 밟으면 되는구나' 하고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손 놓고 쌩쌩 달리는 건 전혀 달라요. 성철은 말했어요. 닦을 게 남아 있다면 그건 머리로만 이해한 것(해오)이지, 진짜 깨달음이 아니라고요. 진짜 깨달음(증오)은 그 순간 모든 게 끝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단번에 깨치고 단번에 닦음이 끝난다', 즉 '돈오돈수'예요. 깨달음과 닦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덩어리라는 거죠.
800년 만에 다시 붙은 불
성철의 주장은 그냥 학자들끼리의 토론이 아니었어요. 그는 한국 불교에서 가장 큰 조계종의 최고 어른인 종정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거든요. 그런 사람이 700년 동안 정답이던 지눌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틀렸다고 한 거예요. 당연히 불교계가 발칵 뒤집혔고, 학자와 스님들 사이에 긴 논쟁이 이어졌어요.
성철은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그는 '대충 깨친 척'하고 멈추는 걸 가장 경계했어요. 깨달음에 단계를 두면, 사람들이 '나는 깨달았으니 이 정도면 됐다' 하고 어설픈 자리에 주저앉기 쉽다고 본 거죠. 그래서 깨달음의 기준을 더없이 높게 못 박았어요. 종정에 오르며 그가 남긴 유명한 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도, 흐릿한 깨달음이 아니라 모든 게 또렷이 제자리에 있는 완전한 경지를 가리킨 말이에요.
정리
성철의 돈오돈수 논쟁은 결국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었어요. 지눌은 깨친 뒤에도 천천히 닦아야 한다고 했고(돈오점수), 성철은 진짜 깨쳤다면 닦을 게 없다고 했어요(돈오돈수). 어느 쪽이 옳다고 쉽게 판정할 일은 아니에요. 다만 성철이 던진 질문 덕분에 한국 선불교는 '깨달음'을 다시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됐어요. 자전거를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달리는 것이 다르듯, 안다고 믿는 것과 정말로 아는 것은 다르다는 이야기. 성철이 평생 밀어붙인 건 바로 그 까다로운 진짜였어요.


